백가경[하이퍼큐비클](문학과 지성사, 2025)을 읽고
사람은 자기 본인으로서 말할 때 가장 자신이 아니게 된다.
그에게 가면을 주어보라, 그러면 진실을 말할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
시집 커버는 파란색이다. 심연을 알 수 없는 바다를 연상하게 하고, 비 오는 날 도착한 책은 빗방울을 머금은 것 같기도 했다. 제목을 빨리 읽으면 욕 같기도 한 이 시집은 속독할 수 없었다. 난 뜨개질하듯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한 줄을 대바늘 코에 꿰어 정성껏 떴다. 부피는 얇았지만, 시인이 만든 세계는 차가운 바닷속처럼 깊고 처연했다. 내 눈을 부릅뜨게 했다. 인쇄 활자를 작게 만들고(「아래를 보시오」), 벽돌을 세우고(「벽돌공의 벽돌벽」) 규칙과 상식을 넘겨 세계를 지어냈다. 그녀의 세계에 발 딛기 위해, 머릿속 견고한 이미지와 고정관념을 부수기 위해 부지런히 작업해야 했다. 작은 글씨가 안 보여 노안인가 잠시 슬프기도 했었고.
시인이 만든 세계 중, 노상 방뇨를 한 것 같이 멋쩍어지는 시 한 편을 골랐다. 독문학과 대학 시절 교수님께서 지정해 주신 러시아 문학 필독서,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함께 밤을 보낸 기억도 떠올랐다. 아래는 「오블로모프」 속 몇몇 구절을 발췌한 뒤 나름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환청은 언제나 자신의 안부가 궁금”하다고? 그렇다면 시인이 듣고 싶은 환청은 무엇이었을까? 월세 200에 20 선생님이 아닌 수십억짜리 으리으리한 아파트 사장님이었을까. ‘열쇠가 있기에 감옥도 집이 된다’는 발상이 멋졌다. 그녀는 허름한 현실의 격조를 높인다. 주말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시인. 누군가가 보낸 안부를 옆에 뉘고 온종일 누워있었다고. 그걸 말한 것이 노상 방뇨하다 들킨 것 같다고. 지극히 사적인 장면, ‘노상 방뇨’만큼 숨기고 싶을 장면이 있을까.
시인은 말한다. 한 줄의 문장도 쓰지 않았지만 수천 마디의 메아리를 탕진했다고. 그녀는 나를 수동적인 독자로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쏘팔메토’는 요즘 핫한 정력제라고? 난 ‘우랄산맥’과 ‘쏘팔메토’ 그리고 ‘다이닝 클럽’의 공통점을 찾지 못했지만. 그녀가 치부를 내보였기에 안심하고 내 안에 켜켜이 쌓인 한숨을 쉬어본다.
환청은 시인을 흔들고 들어 올렸다가 결국 박제되듯 통조림에 갇히고, 그녀의 언어 속에 저장된다. 썩은 어금니. 그녀의 작은 고시원에서 삼킨 부유하는 언어.
그녀가 읽은 러시아 소설 “[오블로모프] 1·2”권 속 주인공처럼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메아리는 환청에 담겨있다. 노상 방뇨 들킨 것 같다는 고백에, 시인의 손을 잡고 한층 더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