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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창 응봉 최중원 Feb 15. 2020

장난감 가게

어서 오세요. 어떤 장난감을 찾으시는지요. 아, 조카분께서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이제 막 초등학교를 들어간다구요. 이리저리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는지요, 아니면 한 자리에 앉아서 진득하게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하는지요? 조카분의 플레이 스타일을 잘 모르겠다고요. 아 아니요,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저희 가게에 오시는 대부분의 손님들이 대부분이 그러시거든요. 물론 고민도 하기 싫고 이것저것 복잡한 것 재고 따지고 하기 싫으시다면, 저편에 진열된 „국민“ 장난감 시리즈들을 사시면 됩니다. 대부분이 큰 회사에서 만든 거라 아무래도 신뢰가 가지요. 중고나라에서 되팔 때도 가격 방어가 잘 되구요. 하지만 짐작컨데, 저 „국민“시리즈를 사시기 위해 멀리 저희 가게까지 찾아주시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네, 손님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조카에게 이렇다 할 뭔가를 사주지 않다가 이번에 왜 갑자기 선물을 줄 생각을 하게 되신 건지, 그 이유까지 저희에게 다 설명해 주신다면 저희가 모든 사정들을 고려하여 딱 맞는 장난감을 추천해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매형과의 사이가 약간 틀어졌는데, 업무와 관련된 일로 매형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이란 말씀이시죠. 때 마침 조카의 생일이 코앞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일단 조카의 생일 선물을 사서 매형의 환심을 얻으시려는 거구요. 네, 어떤 전략인지 이해했습니다. 흔히들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이가 있는 집의 부모들은 자신들을 위한 선물보다 아이를 위한 선물을 받았을 때 더 좋아한다. 물론 모든 게 케바케 사바사이긴 하지만, 저는 손님께 다른 방향의 접근을 추천드리고자 합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가게는 장난감 컬렉션으로는 한국 최고, 세계에서 두 번째의 방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모든 취향, 모든 장르, 그리고 모든 연령대별로 다양한 제품들이 구비되어 있지요. 네, 맞습니다. 매형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매형을 위한 장난감을 선물해드리는 것이 효과 직빵 아니겠습니까?

말씀해주신 내용으로 제가 추측하건대, 매형은 금융업에 종사하신다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투자 심사를 담당하고 있겠지요. 어떻게 알았냐구요? 그렇게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래 보여도 이 가게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었거든요. 고등학생 때부터 알바로 판매 보조 일을 했었으니까요. 그간의 경험으로 저는 이제, 예컨대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문의 경첩에서 나는 소리만 듣고도 바비인형을 사러 왔는지, 터닝 메카드나 탑블레이드를 사러 왔는지, 레고를 사러 왔는지 아니면 프라모델을 사러 왔는지도 구분할 수 있답니다. 건담 프라모델을 만드는 사람들과 밀리터리 프라모델을 만드는 사람들은 문을 여는 박력부터가 다르다니까요. 그럼요,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을 때 저는 그 소리 만으로, 아 이 분은 아무 생각이 없구나. 장난감에 대해 아는 것이 없구나, 깊은 상담이 필요하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뇨, 이건 설명해드리기도 힘들고, 해드릴 수도 없습니다. 일종의 영업비밀 같은 것이니까요.

자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금융업에 종사하시는 40대 중반의 남자분. 아마 영국에서 유학을 하고, 해외 은행에서 근무했던 경험도 있으시겠지요. 그만 좀 놀라세요. 이렇게 하나하나에 다 놀라신다면 상담이 매끈하게 진행되기 어렵습니다.  슬하에 아이는 한 명. 딸이구요. 그럼 제가 몇 가지만 더 여쭈어보겠습니다. 매형이 자신의 아내분, 그러니까 손님의 누님을 부르실 때 어떤 호칭을 사용하시는지요? 서로 이름 뒤에 씨를 붙이고, 반존대를 사용한단 말이죠? 그럼요. 아주 중요한 정보입니다. 제일 가까운 사람과의 사이에서 서로를 어떠한 관계로 위치시키는지. 매우 의미심장하지요. 서로 반말을 하는 부부들은 심리적인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위험하다고도 말할 수 있죠. 서로를 거의 동일시하거나, 서로에게 너무 큰 애착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애칭이 있다면 그건 뭐 백 퍼센트이죠.  장난감을 주로 취급하는 제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이건 순전히 어렸을 때 자신이 좋아하고 애착하는 장난감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장난감 인형의 눈이 떨어지고 색이 닳아서 결국 엄마의 손에 의해서 버려진다던지, 혹은 소풍을 다녀오는 길에 잃어버리는 등의 상실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관계의 유한함을, 그리고 그다음에 다시 선물 받은 새 인형과 처음엔 서먹서먹하다가도 곧 서로 좋아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은 넓고 장난감은 많다는 명제를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장난감이 너무 많다던지, 장난감을 가지고 놀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던지, 아니면 너무 일찍부터 스마트폰이나 티브이를 보고 자라서 특정한 대상에 애착을 키워나가 본 경험이 없이 청소년기를 맞이하게 되면, 어휴, 말도 마세요. 평생 사랑과 전쟁을 찍는 겁니다. 나의 마음을 못 믿고 상대의 마음도 못 믿고, 사랑이며 관계는 모든 게 영원할 거라는 것만 믿고, 영원하지 않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겁니다. 네? 장난감보다 부모와의 애착이 더 중요한 게 아니냐구요? 당연히 그렇죠. 하지만 장난감 가게에서는 장난감 이야기를 해야죠. 게다가 부모님과의 관계 같은 것은 너무나 개인적이고 예민한 문제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꺼내 봤자 저희 가게 매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구요. 그런데 손님 표정이 별로 안 좋으신 것 같은데, 혹시 아내분과 오그라드는 애칭으로 서로를 부르고 그러시나요? 에이. 농담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발자국 소리부터가 다르거든요.

제가 이제부터 여쭤볼 것들은, 조금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맞춤장난감을 권해드리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혹시라도 이런 복잡하고 불편한 것 다 싫고 얼른 무난한 것 하나 사서 여길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신다면,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국민“ 장난감은 모든 연령대에 걸쳐서 있답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손님 분과 매형분이 어쩌다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제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매형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서 선물을 사는 것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제가 사연을 자세히 알고 있으면 알고 있을수록 효과가 좋은 장난감을 추천해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아, 그렇군요. 이유도 잘 모르겠고, 이렇다 할 계기도 없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이유가 더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는 말이죠. 세상에서 이유가 없이 벌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거든요. 자 그럼 이렇게 생각을 해 봅시다. 손님께서는 지금 일곱 살쯤 되는 아이이고, 폭신한 매트가 깔린 방에 앉아서 여러 장난감들을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태엽을 감아 움직이는 경찰차, 배를 누르면 노래가 나오는 곰인형, 요리 놀이를 할 수 있는 작은 주방과 천으로 만들어진 식재료 키트, 각각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바비와 캔 커플, 그리고 아프리카 사바나에 사는 동물들을 꽤 사실적으로 묘사한 인형 세트. 그런데 이 방에는 손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일곱 살 먹은 매형도 앉아있죠. 장난감 하나도 없이 맨손으로 말입니다. 손님은 매형에게 손님이 가진 장난감 중 하나를 양도하려 합니다. 그 장난감은 무엇일까요?

쉽지 않은 질문일 텐데, 잘 대답해주셨습니다. 여기 손수건이 있습니다. 조금 진정하시구요. 그럼요, 이해합니다. 누군가에게 장난감을 나눠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미운 일곱 살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 나이에 이타심을 가진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죠. 손님께서는 누님과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으셨고, 옷이며 장난감이며 책이며 많은 것을 함께 공유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님이 더 많은 기회를 얻고, 더 많은 사랑을 받고, 더 많은 성과를 내는 것을 보며 많이 힘드셨겠죠. 네? 심지어 생일도 누나보다 하루 늦어서, 누나 생일 때 먹고 남은 케이크를 그대로 손님의 생일상에 올렸다고요? 이해합니다. 그런 얄미운 누나의 남편이니, 매형에게 단 하나의 장난감도 주고 싶지 않다는 대답이 나올 만하지요. 그런데도 사람이란 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지금 아내 되시는 분이 연상이시잖아요.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가게 문 손잡이를 돌려 열기 전 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 소리만 들어도 저는 다 알 수 있거든요.

제가 제 이야기를 잠깐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위로 오빠가 하나, 아래로 동생이 둘 있죠. 여동생 하나, 남동생 하나. 쌍둥이였구요. 큰오빠는 저보다 나이가 두 살밖에 많지 않았지만, 제 아래 동생들은 저보다 여덟 살이 어렸죠. 부모님들은 동네에서 작은 가게를 하셨는데, 사람을 따로 쓸 정도로 매출이 나지는 않아서 쌍둥이들은 거의 제가 키운 거나 진배없습니다. 오빠는 맨날 나가 놀기만 하고, 분유 온도도 잘 못 맞추고, 애들 울리기나 하고, 도움이 안 되었죠. 집에는 장난감이라곤 엄마가 어딘가의 바자회에서 주워 온 머리숱이 별로 없는 바비 인형 하나랑, 기차에서 로봇으로 변신하는 로봇 하나, 그리고는 모두 합쳐서 스무 조각 정도 될 법 한 레고 조각들 뿐이었는데, 오빠와 제가 가지고 놀 때만 해도 아직 터럭이 남아있었던 바비는 쌍둥이들의 손에 쥐어졌을 때엔 완전히 대머리가 되어 있었죠. 기차 로봇도 바퀴의 절반이 빠져 있는 상태였구요. 하지만 아이들이 얼마나 창의적인지, 그 장난감들로도 부족함 없이 재밌게 놀더군요. 어린이집에서 열린 중고 장난감 장터에서 엄청 삐까 뻔쩍하고 흠 없고 다양한 다른 아이들의 장난감을 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인형들의 머리카락이 너무 풍성하고 결이 좋더라구요. 이상하게도 저는 그전까지는 장난감에 대해 그렇게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좀 더 어렸을 때에도 장난감은 너무 유치해 보였죠. 아마도 어떠한 종류의 반감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생들을 달래고, 인형에게 모발 이식 수술을 해주기 위해 제 머리카락들을 모으다 보니, 갑자기 강렬한 욕구 같은 게 생기더군요. 당연히 대상은 장난감이었죠. 하지만 대상만 있을 뿐, 제가 그 대상을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인지는 알 수 없더라구요. 장난감을 많이 사고 싶은 것인가, 직접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장난감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은 것인가, 직접 만들고 싶은 것인가. 어쨌든 이런저런 방법으로 동생들에게 장난감들을 마련해주면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이후에는 어찌어찌 장난감 업계 주변을 맴돌다 여기에서 일하게 된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일이 직업으로서 그렇게 좋다고는 할 수 없죠. 근무 강도도 빡세고, 세계의 많은 장난감 메이커들은 매년 엄청 많은 수의 신제품들을 쏟아내고, 트렌드도 여간 빨리 바뀌는 게 아니라서요.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구요. 하지만 제게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장난감 옆에 붙어있어야 했거든요.

손님을 보면 꼭 예전의 제 생각이 난단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제가 쓸데없이 제 이야기를 많이 해버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손님은, 단 한 번도 정말로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장난감이야 많이 가져봤겠죠. 제가 말하려는 것을 조금 더 정확하게 다시 표현하자면, 지금까지 한 번도 장난감과 깊은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장난감에 이름을 따로 지어주었던 적, 없죠? 이 일만 10년째입니다. 손님의 옷차림만, 코트 안에 받쳐 입은 셔츠의 카라 모양만 봐도 알 수 있어요. 헤져버린 장난감을 엄마가 버리고 새로운 장난감을 사 와서 엄마에게 그 장난감을 다시 가지고 오라고 울어 본 적 없죠? 손님의 바짓단 높이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매형과의 문제도, 누나와의 문제도, 아내와의 문제도, 직장 직속 상사와의 문제도, 아랫집 사는 김 씨 성을 가진 할머니와의 문제도, 리그 오브 레전드 등급이 쉬이 오르지 않는 문제도, 주식 투자를 할 때마다 번번이 돈을 까먹는 문제도, 결국에는 어렸을 때 그런 단 하나의 장난감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그 사실을, 손님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이 층에 도착했다는 딩동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알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제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말씀하셨다시피 저희 매장은 모든 연령대를 위한, 모든 취향을 커버하는, 세계 2위의 방대한 컬랙션을 자랑하니까요. 그리고 저는 그 누구보다도 장난감 추천을 잘하는 전문가니까요. 지금 장난감이 제일 필요한 사람은 조카도 매형도 아닌 손님 자신이십니다.

그만 일어나셔서 저를 따라오시죠. 말씀하신 내용을 바탕으로 제가 이미 손님에게 필요한 장난감을 골라 두었습니다.
카드로는 3개월까지 무이자 할부가 됩니다. 지금 들고 가시기 애매하다면 댁까지 배송해드릴 수도 있고요.
저희 매장 멤버십에 가입하신다면 매번 구입금액의 5프로를 적립해드리는데, 포인트가 5만 점 이상 쌓이면 현금으로 사용하실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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