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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창 응봉 최중원 Mar 07. 2020

이불

낯선 호텔방의 바삭거리는 이불에서는 익숙한 향기가 났다.

 묘하게 무거우면서 가볍게 서걱거리는 하얀 천을 끌어모아   쪽으로 당기면서 나는  어젯밤 내가 잠든 사이에  세상이 망해버리지 않은 것인지 불평했다. 나는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불평은 향할 곳을 찾지 못한다.  PC 한 세상에서 생각 없이 꺼내기 좋은 유머는 자기 비하이고, 생각 없이 불평하기 좋은 대상 역시 나일터이니  화살을 나에게 겨누어 보자. 어제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으로 시키면서 빨대는 됐어요, 하고 말했을  알바생이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하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어봤다. 텀블러라도 들고 다니면서 담아달라고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미 일회용 잔에 담긴 음료를 받아놓고 빨대는 됐어요,라고 말했다니. 하지만 내가  빨대 하나를  받아 하나의 빨대 쓰레기가  만들어졌고,  덕분에  멀리 태평양에서는 바다거북 한 마리가 코에 빨대가  걱정 없이 헤엄칠  있게 되었으며, 0,0001 마이크로그람의 환경호르몬이  몸과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몸에  축적되게 되었고, 덕분에 인류는 아직도 그들의 생식능력을 유지할  있게 되어 오늘도 수많은 아이들이 힘차게 세상으로 나와 응애 하고 울어재끼고, 그렇게 유지되는 출산율 때문에 인류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경제라는 오래된 환상에 기반하는 끝없는 착취의 되물림을 여전히 오독하고 그 때문에 아무 의심 없이 오늘도 회사로 학교로 출근할  있고, 사람들의 불만은 아슬아슬하지만 아직 임계치를 넘지 않아서 전세계적인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렇게 중국에서는 시진핑이, 러시아에서는 푸틴이, 미국에선 트럼프가, 필리핀에서는 두테르테가 아직 힘을 잃지 않고 있으며, 그래서 핵전쟁도, 인류를 지구의 위협으로 여기는 AI, 코로나 19보다 몇십 배는   전파력과 치사율로 인류를 제거하는 바이러스도 등장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쓸모없고 그닥 재미도 없으면서 논리적으로도 매끈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 A4 용지에서라면 10포인트로 9 가량은 넉히   하나의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침대맡에  볼페펜으로 적어놓았던 메모지를 뜯어 고이 간수하기로 한다.  글씨체가 워낙 엉망이라 나중에 봤을때 나조차 제대로 읽지 못할 확률이 높지만, 어차피 언제나 그랬던  처럼 다시 읽어볼 일은 없을 것이다.  볼펜의 플라스틱은 너무 조악하여 글을 끄적거리는 내내 덜그럭덜그럭거렸고,  쓰고 났을   오른손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뚜껑 윗부분에는 아기가 집어삼켰을  질식을 유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구멍이  있었다. 이렇게 인간을 배려하며 디자인 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존윅의 손에 들어가면 그냥 푹푹이가  뿐인데.

오늘은 하루종일 이불 밖에서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룸서비스로 삼시 세끼를 시켜먹을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언제나처럼  배고픔이 일정 정도를 초과하면 견디지 않고  곳을 기어나가서 호텔 바깥 어딘가 골목의 김밥천국을 찾아 해메게  것이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몸을 반쯤 일으켜서 침대 옆에 나있는 창문 밖을 바라본다. 쥐색의 하늘이다. 전체가 구름으로 뒤덮여 있는 것인지, 아니면 미세먼지때문에 하늘이 쥐색인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하늘과 건물들도 색이 비슷하여 후물거리며 섞여들어가고 있었다. 호텔에 묵는 삼일 내내 서울은 흐리다고 했다. 삼일 안에 그가 오면 좋을텐데.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내가 지금  호텔에 있는지, 서울에 있는지, 심지어는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 카톡으로 1205, 모레까지, 라는 짧은 메세지를  호텔의 주소와 함께 보낸다면 그는 금방 달려올 것이지만,  그러기는 싫다. 도대체가 쓸데 없는 심술이다.

우리는 오래 알고 지냈고, 자주 맛있는 것을 같이 먹었다.

같은 이불을 덮은 것도   없다. 부드럽거나 꺼칠하고, 뽀송하거나 눅눅하고, 무겁거나 가볍고, 화려하거나 겸손했다. 바삭거리거나 혹은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언젠가 그는 나에게 기모노 이야기를  적이 있었다.  가모노는 네모난  덩이의 천이어서, 그걸 펴서 깔면 바로 요가 된다고. 섹슈얼한 맥락과는 별개로 그는 자신의 침구류를 언제나 짊어져 두르고 다닌다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디에 있건 무슨 상황이던 졸리다면 털석 주저앉아 자신의 옷을 벗고 바닥에 깔아서  위에서   있다니! 나는 나름대로 타당한 걱정을 제기했는데, 기모노는 속옷을 입지 않고 입는 것이기에 요즘 시대에 밖에서 그렇게 요를 펴면 풍기문란죄 혹은 노출죄로 잡혀갈수가 있다는 것과, 그리고 요가 있어도 덮고  이불은 없기 때문에 밤에는 추울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도 비슷한 옷을 입힐 것이라고, 한명의 옷은 요로 하고 다른 한명의 옷은 이불로 하면 쓸데없이 노출할 필요도 없고 밤의 추위도 피할  있으니 일석이조인셈이 아니냐고 말했다.  괜찮은 해결법이었다. 그러나 쿠팡에서 기모노를 검색해보았을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없어서 구매를 망설이는 동안에 일본과의 사이가 갑자기 안좋아졌다. 길거리에서 기모노를 입고 돌아다녔다간 다구리라도 당할 분위기였고, 그는 꽤나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이유 없이 가까워졌던  처럼 우리는 이유 없이 멀어졌다. 아니 이유야 있다. 그렇게 새롭지 않고, 뻔하기 때문에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뿐이다. 호텔의 이불이 언제나 하얀것처럼, 사람들은 언제나 만났다 헤어진다.


이렇게 혼자 휴가를 내서 호텔에 들어온 참에 굳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만히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생각은 전자렌지의 고주파에 자극된 물분자처럼 이리저리 튀어 선을 넘고  멋대로 새로운 생각의 스레드를 열어버린다.   휴가  카드키를 호텔 방의 잠금장치에 대고  소리를 들으면서  다짐하는 것이 바로   안에서는 일이나 회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혼자 망상하길 좋아하는 나로서도 하는  하나 없이 몇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 뒹굴다 보면 어쩔수 없이 강남 어느 구석 이면도로 사무실에 기거하는 대머리와 투블럭과 금발과 과할 정도로 깔끔하게 다듬은 수염과 어울리지 않는 장발의 얼굴들이 천장 방에서 슬며시 하나둘씩 나타나서는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신성한 나의 호텔 방에 들이고 싶지 않은 군상들이다. 혹시나  업무상의 연락도 받기 싫어서 태국으로 여행을 간다고 뻥을 치고 핸드폰도 비행기모드로 해놓았던  아닌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은  재밌고 짠하다.  일은 빡세고 야근도 자주 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옮겨다녔던  댓개의 회사들 중에서는 그래도 사람들이 괜찮은 편이다.  머릿속에서 둥지를 틀고는 가끔 자기 내킬때 날아들어오는 그도 몰아내 볼겸, 나는 음소거 버튼을 한번 다시 눌러서 회사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보기로 한다.

이봐요들, 오늘 아침 회의 시작하기 전에 하나 부탁이 있어. 내가 이번에 딸내미 다니는 학교에서 직업특강 같은 것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거는  처음이라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 시작할  엄청 먹히는 농담같은 것을 해서 기선을 제압하려고 열심히 고르고 골라본  하나 있는데, 한번 들어보고 재밌는지 어떤지 한번 의견을 줘봐요. 내가 팀장이라고 재미 없는데 재미있다고 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평가해줘야해. 알겠지? 모두 자신이 중학생이라고 생각하라고. 인사고과 점수니 그런거 중학생들은 신경쓰지 않아. 어이 벌써부터 웃으면 어떻게 , 진지한 자세로 임하라고!   그럼 어디보자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중학교가 어딘줄 알아요? 미리 말하자면 다행인 것은 여러분이 다니고 있는  중학교는 아니고…“
로딩중!“
 잠깐만, 박대리. 이거 어떻게 알아? 아니 그것보다 안다고 해서 대답을 하면 어떻게 ! 대답을 하라고 물어본  아니라고!“
하지만 팀장님, 돌발 상황에도 대응하실  있어야죠. 진짜로 누군가가 정답을 맞출 수도 있는 거잖아요
대리님, 요즘 어떤 중학생이 이런 개그를 알아요..“
그런가? 그렇지? 중학생은 이런 개그 모르겠지? 그러면 내가 답을 말했을때 모두  터지겠구만. 하하하 좋아  유머로 정했다

최근에 들었던 대화다. 나는 굳이 참여하지 않았다. 나는 팀장의 눈에 들어 진급하고 싶은 욕심도 없지만 그렇다고 팀장의  밖에 들어서 고생길로 들어서고 싶지도 않다. 내가 원하는  거창하지 않다. 4 보험, 오피스텔 월세를 내고, 맛있는 디저트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종종 미국산 소고기 스테이크를 사서 집에서 구워먹고,  달에  번씩 헤어샵에서 펌이나 커트, 트리트먼트를   있고, 들어놓은 실손보험료와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를 납부할  있고, 이년정도 열심히 모으면 동남아로 짧게 해외여행을 다녀올  있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때면  틴더 골드 멤버십에 가입할  있는, 어버이날에는 적당히 무게감있는 봉투를 부모님께 드릴  있는,  정도의 돈을 버는 . 주말이면 천변을 따라 산책을 하고, 멀리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아래 동네로 가서 예쁜 책을 사오고, 가끔 지방에서 올라오는 친구를 데리고 우리집으로 들어와 곱창이며 족발을 시켜 먹으면서 연애사나 새로 타고 있는  이야기를 듣다가 늦게 잠들수 있는 정도의 여유. 생각없이 호텔의 하얗고 서걱거리는 이불이 그리워지면 나는 주말을 껴서, 혹은 휴가를 내서 양손에 핸드폰과 지갑을 하나씩 들고  지하철을 타고 터덜터덜 호텔 로비로 걸어와 오늘처럼 체크인을 한다. 샤워를 하고 맨몸으로 보드라운 샤워가운을 입은 다음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아무도 없기 때문에 옷매무새를 다듬을 필요도 없이 침대에 걸터앉아서 적당히 흰색과 살색과 머리카락의 검은색이 이리저리 범벅이  나를 비추는 거울을 보면, 세삼스럽게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 온갖 감각들을 통해서 느껴진다.

 밖은 벌써 해가 지려는지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흐린 하늘 때문에 붉게 노을지는 그런 것은 없고, 회색에서 슬라이더가 내려가듯 조용히 명도가 낮아질 뿐이다. 나는 호텔방 천장에서 배회하는 여러 헤어스타일의 얼굴들을 애써 헤쳐버리고 오늘 일어나서 처음으로 이불을 걷고 침대 밖으로 나와 창가쪽으로 걸어갔다. 배에서 우렁차게 꼬르륵 소리가 났다. 김밥천국에  시간이다.  건너편에는 어느 중학교인가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교실의 불이 모두 환하게 켜져 있었다. 저녁시간인지 운동장에서는 농구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야자를  가지 않고 집으로, 학원으로 향하는 아이들도 삼삼오오 모여서 교문 밖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팀장님의 중학생 딸을 나는 우연히    적이 있었다. 여느 중학생들처럼 작고,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에게 불만이 가득차 있었다. 아빠가 직업특강을 하고   저녁이면 아마도 이불킥을 하게 되겠지만, 금방 모두가 모든 것을 잊게  거라는  정도만 말해주고 싶다.

김밥천국의 김밥과 라면세트는 언제나처럼 맛있다. 굳이  맛있어질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히 맛있다.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고, 아무도 굳이 이유를 묻지 않는다.  마치 호텔의 이불이 모두 바삭하니 하얗고, 사람들이 모두 만났다 헤어지고, 아빠들이 모두 짠하게 재미없는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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