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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부르크의 최중원 Aug 15. 2020

생일

바다가 보이는 방에서 고양이의 배를 만지며 귤을 까먹는 이야기 

1

지금까지 나는 싱글로서 내 생일을 지냈던 적이 없었다. 물론 성인이 된 이후로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는 그랬다.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인기가 많은 남자가 아니다. 잘생겼다거나, 위트가 있다거나, 말주변이 좋다거나, 옷을 잘 입는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생일 다음날 헤어지고 다음 해 생일 하루 전날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던지 하는 정도의 우연이 몇 번 일어났다고 해 두자.


이 년 넘게 사귀던 사람에게 차이고 난 다음날 나는 온종일 집에 있었다. 넷플릭스를 하루 종일 봤고, 삼시 세끼 바나나만 먹었다. 예전이었다면 이소라라던지 데미안 라이스라던지 루시드 폴의 노래들을 들으면서 술이라도 마셨겠지만, 이제는 부쩍 줄어든 체력 때문 에라도 그렇게 청승 떨지는 못한다. 


이별 같은 것은 여러 번 해본다고 해도 익숙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괜찮아진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도움이 된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은 그러니까, 낯선 항구에 배를 정박시킨 다음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어부의 마음으로 이별이 끝나길 기다리는 것이다. 언젠가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잦아들고, 그렇듯이 나도 괜찮아진다. 


열두 시가 지나 헤어진 지 사흘째가 되자 갑자기 내 핸드폰에 알림이 하나둘씩 오기 시작했다. 준오헤어, 피자마루, SK 텔레콤, 하이마트 봉천점, 코레일, 카카오프렌즈, 매드 포 갈릭, 그 외 온갖 브랜드들에게서 내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특별 할인 쿠폰들이 날아왔다. 그제야 나는 그 날이 내 생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할 것이 없는 생일은 처음이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나는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생일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얼마 만에 자유로운 생일인가. 물론 누군가와 함께 보냈던 지난 생일들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행복하고 즐거웠다. 하지만 막상 싱글이 되고 나니, 왠지 모르게 싱글로도 충분히 즐겁게 생일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직접 증명하고 싶다는 충동이 솟아올랐다.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았지만 생일을 혼자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아이디어는 생각처럼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고민 끝에 책상 어디서 굴러다니는 A4 용지를 하나 줍고, 그 위에 모나미 펜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적어보았다. 귤, 바다, 고양이. 이틀 전까지 연인 사이었던 사람의 이름을 제외하고 나니 이 세 가지가 남았다. 때마침 1월인지라 귤은 슈퍼에서 사면 그만이었다. 바다도 보러 가면 된다. 문제는 고양이었다. 고양이를 어디서 구하지? 


문득 내가 사는 오피스텔 건물 일층에 사는 사람이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우고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윤기가 흐르는 예쁜 검은 고양이었다. 그 고양이는 종종 혼자서 산책을 나갔다 오곤 했다. 근처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에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주인이 있는 고양이였기에 나는 한 번도 그 고양이한테는 간식을 사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고양이를 데려갈 수는 없다. 명백한 납치였다. 고양이야 바닷가의 마을에 가면 많을 것이다. 나는 입을 옷들과 양말 속옷, 그리고 치약 칫솔을 챙겨서 백팩에 쑤셔 넣었다. 키우는 마리모의 물을 한번 갈아준 다음에 문을 닫고 나왔다. 슈퍼에 들려서 귤을 한 봉 샀다. 편의점에 들려서 츄르 다섯 개를 샀다.  나의 계획은 이러했다. 버스를 타고 강릉이나 속초, 아무튼 동해에 접한 도시로 간다. 바다가 보이는 숙소를 구한다. 동네를 돌아다니는 고양이 한 마리를 숙소로 초대한다. 바로 그때 츄르가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다. 그리고는 바다를 보면서, 그새 친해진 고양이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귤을 까먹을 생각이었다. 홀로 보내는 나의 생일로써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편의점을 나오던 나는 어두운 구석에서 밝게 빛나는 노란색의 두 눈을 보았다. 아랫집의 그 검은 고양이었다. 마실을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혹시 그 봉지에 든 거 츄르인가요?“

확장된 동공으로 고양이가 내게 공손하게 물었다.

„어떻게 아셨죠?“

„고양이의 후각은 생각보다 훨씬 좋거든요.“

부드럽게 세운 꼬리를 살랑이며 고양이가 다가왔다. 

„실연이라도 당하신 모양이네요.“

„그건 또 어떻게 아셨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고양이의 시각도 생각보다 좋거든요. 말라붙은 눈물 자국 좀 닦고 나오시지 그러셨어요.“ 검은 고양이는 그렇게 설명하며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내 다리에 자신의 몸을 비볐다. 나는 눈 주변을 손으로 대충 비벼서 닦은 다음에 쪼그려 앉아서 고양이의 부드러운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그 닭가슴살 맛 츄르는 어떤 고양이에게 줄 생각이신지? 집에 고양이 키우지는 않으시잖아요?“

몸을 비비며 몇 바퀴를 돈 고양이가 내 앞으로 다시 와서 앉은 다음에 물었다. 

„바다로 갈거거든요. 거기서 만난 고양이에게 주려구요.“

„공짜로? 아무 대가 없이?“

„큰 거 바라지는 않아요. 다만 하루만 저랑 같이 있어 주면 좋겠어요. 그렇게 부탁해보려고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배를 만지는 것도 허락해달라고. 처음 보는 사이에 그 정도면 좀 무례한 요구일까요?“

검은 고양이는 조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꼬리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이라면 좀 무례하죠.“ 잠시 뒤 검은 고양이가 말을 이었다. „ 츄르 백개를 들이밀어도 허락할 고양이는 없을 거에요.“


그 말에 내가 크게 낙심하고 있었는데, 검은 고양이가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 하지만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봤고, 종종 안부인사도 나눴고, 게다가 같은 건물에 사니까, 특별히 다섯 개 정도라면 제가 허락해드리죠. “



2

집에서 동서울 터미널까지는 걸어서 십 분이었다. 검은 고양이를 내 배낭 위에 태우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터미널로 향했다. 나는 새벽 한 시에 출발하는 막차를 아슬아슬하게 잡아탈 수 있었다. 길은 텅 비어있었다. 버스 안에도 손님이 우리뿐이었다.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드문드문 이야기를 하면서 속초로 향했다.


검은 고양이의 이름은 까망베르였다. 아무리 검은 고양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런 이름을 지어주다니, 하고 까망베르씨는 투덜거렸다. 까망베르씨는 주인에 대한 불만을 많이 적립해 놓고 있는 것 같았다. 화장실 모래를 잘 안 갈아주지를 않나, 사람들이 볼일을 보는 변기에 무슨 고양이용 키트를 끼워서 거기에 볼일을 보라고 강요하지 않나, 놀아주는 것도 귀찮아하고, 무엇보다도 츄르에 너무 인색했다. 

„알죠 동현씨? 츄르 이거 하나에 얼마 안 하잖아요. 아니 그 정도는 일주일에 하나 정도 사줄 수 있는 거 아니냐구요.“ 까망베르씨가 계약금 조로 내가 먼저 지급한 닭가슴살 맛 츄르를 맛있게 핥아먹으면서 투덜거렸다. 


속초 터미널에 내렸을 때에는 새벽 네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속초 터미널은 바다와 멀지 않았다. 우리는 우선 바다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자 방향을 틀어 바다를 따라 북쪽으로 갔다. 고양이와 함께 걷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얼마만큼의 보폭으로, 얼마만큼의 빠르기로 걸어야 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걷는 속도를 반 박자 정도 늦추고 나니 금방 우리의 발걸음은 즐거운 리듬으로 함께 움직였다. 한겨울이었고 바람도 많이 불었지만 그리 춥지 않았다. 바다의 냄새가 나는 새벽 공기는 상쾌했다.


나는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다. 비성수기이고 평일이었다. 빈 방이 많을 것이다. 밤을 새웠지만 졸리지 않았고 별 다른 할 일도 없었다. 괜찮은 방을 발견할 때까지 걸을 예정이었다. 오늘은 왠지, 운명처럼, 바다를 향해 통창이 나고 잘 정돈되어 있는 방이 내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고양이는 원래 야행성인 거 알죠?“ 혹시 졸리냐고 물어봤더니 까망베르씨가 대답했다. „바닷바람이 좋네요. 생선 냄새도 향긋하고. 걸어 다니다 갑자기 제가 사라져도 놀라지 말고 가던 길을 가세요. 금방 돌아올 거니까. “

„속초에 친구라도 있나요?“ 내가 물었다.

„아뇨, 널어놓아 말리고 있는 생선 한 토막이라도 물어올까 하구요. 혹시…동현씨도?"

나는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


새벽의 속초 거리는 한적했다. 가끔씩 수산물을 운반하는 트럭들만 거리를 지나갈 뿐이었다. 우리는 여객선 터미널을 지나서 방파제를 따라 걸었다. 곧 모래사장이 나왔다. 비수기인지라 해변에 설치된 가로등의 대부분은 꺼져있었다.  모래사장은 끝을 알 수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지만 파도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해변의 반대편에는 횟집이며 카페들이 늘어서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모두 불이 꺼져있었다.


하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요가 마스터급의 난이도가 있는 포즈로 그루밍을 하던 치즈 고양이가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포즈를 유지한 채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봤다. 원래 나는 길거리에서 고양이를 만나면 무조건 발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편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양이 동행이 있어서 망설여졌다. 아무래도 지금은 그냥 같이 걸어가는 고양이에게 집중하는 편이 낫겠다. 


„동현씨는 고양이를 참 좋아하는군요.“ 다시 고개를 숙여 그루밍에 열중하는 치즈 고양이를 흝어 보더니 까망베르씨가 말했다.

„네, 귀엽잖아요.“ 왠지 모르게 뜨끔해하며 내가 답했다.

그 뒤로 우리는 여러 색과 여러 무늬의 고양이들을 많이 만났다. 나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해변이 끝나니 작은 항구가 나왔다. 주변이 갑자기 북적북적해졌다. 조업을 마치고 들어온 어선들에서 오늘 잡은 고등어며 오징어 등을 내리는 작업이 한참이었다. 환한 조명이 켜진 부두 아래로 생선을 담은 박스들이 쌓여있었다. 까망베르씨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종종 멈추고는 코를 킁킁거렸다. 아무래도 갓 잡은 신선한 생선의 냄새가 그의 후각을 강하게 자극하는 것 같았다.

„까망베르씨, 혹시 생선을 원하신다면, 저한테 참치나 가다랑어 맛 츄르도 있어요.“ 등에 맨 백팩의 보조주머니를 한 손으로 툭툭 치며 내가 말했다.

„동현씨, 갓 잡은 고등어 날 것으로 먹어본 적 없죠?“ 까망베르씨가 물었다.

„네, 고등어라면 구이나 조림으로밖에…"

„그래서 지금 갓 잡은 고등어 대신 츄르를 먹으라고 말할 수 있는 거군요„

까망베르씨의 기분이 조금 나빠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금세 다시 표정을 풀었다.

„뭐, 인간과 고양이는 입맛이 다르니깐요. 고등어 한 마리를 물고 튀기라도 할까 했지만, 보아하니 동현씨는 그리 잘 뛸 거 같지 않고, 분명 붙잡혀버릴 거예요. 그럼 사람들은 동현씨를 다그쳐서 제 주인의 주소를 불게 만들거구, 그렇다면 제 주인은 돌아온 저에게 화를 내겠죠.„

나는 수염이 나고 우락부락한, 고무장화에 고무 앞치마를 한 어부들이 나를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가서 다그치는 장면을 상상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는 수영도 할 줄 모른다.




항구가 끝나는 곳부터 마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을 초입의 어떤 집 앞에 민박이라고 적힌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2층 높이의 비교적 새로 지은 벽돌집이었다. 2층 한편에는 바다를 향해 크고 넓은 창이 나 있었다. 혹시 저 방을 민박용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바로 저곳이 내 찾던 숙소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민박집의 주인은 삼십 대 후반이 되어 보이는 여자분이었다. 눈을 비비며 대문을 열고 나와서는, 세상에 무슨 손님이 새벽 다섯 시에 오냐고 투덜댔다. 그리곤 열쇠를 주면서 방은 2층에 있다며, 요금이나 그런 거는 내일 이야기하자고 하더니 바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올라와보니 2층은 통째로 민박을 위해 쓰이는 공간 같았다. 문제는 방이 세 개였는데 그중 어느 방이 우리가 묵을 방인지를 알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문에 몇 호인지 알려주는 명패 같은 것도 붙어있지 않았다. 받은 열쇠로 문 하나씩을 열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조금 고민이었다. 다른 손님들이 들어와 묵고 있을 수도 있었다. 자고 있는데 갑자기 자신의 방 문고리가 덜컥 거린다면 분명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닐 것이었다.


„이쪽이에요.“ 까망베르씨가 세 문 중 한 문쪽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어떻게 알아요?“ 내가 물었다. 

„바다를 향해 난 큰 창이 있는 방을 구하는 거 아니에요? 이 방이 그 방이에요.“ 

„하지만 주인분이 주신 방이 그 방이 아닐 수도 있는걸요.“

„아니라면 여길 나가야죠. 처음으로 혼자서 맞는 생일인데, 조건들을 어물쩡 어물쩡 타협할 수는 없잖아요.”

맞는 말 같았다. 오늘은 타협할 수 없다. 까망베르씨가 말한 방문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이 방이 맞았는지 걸리는 곳 없이 부드럽게 열쇠는 끝까지 들어갔다. 문고리를 잡고 열쇠를 돌리려는데 갑자기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생일 축하해. 헤어진 여자친구의 메시지였다. 



3


방은 내가 원하던 그대로였다. 큰 통창 너머로는 바다가 넓게 보였다. 바다 멀리서 오징어잡이를 하는 배의 불빛이 보였다. 물론 아쉬운 점들도 몇 가지 있었다. 침대 대신 방 한편에 개져 있는 이불은 온갖 종류의 꽃들이, 온갖 종류의 색으로 가득했다. 한쪽 벽에는 수영복을 입고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는 여자의 사진이 배치된 달력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한쪽 벽에 접혀서 세워져 있던 좌식 테이블을 꺼내서 네 다리를 핀 다음 창가 쪽에 붙여세웠다. 책상 위엔 귤이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놓았다. 그다음에 핑크색의 방석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방의 여기저기를 서성거리던 까망베르씨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폴짝하고 테이블 위에 올라와서는 비닐봉지 안쪽을 킁킁댔다. 그러더니 금세 관심을 접고는 테이블 위에 드러누워 자신의 몸을 꼼꼼히 핥기 시작했다. 윤기 나는 검은 털들이 분홍색의 혀가 쓸어내리는 방향을 따라 차분하게 결을 바꿨다.


„까망베르씨“ 내가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까망베르씨는 눈을 감고, 마치 단색화를 그리는 화가가 반복되는 붓놀림 속에서 자신을 비우듯이, 규칙적으로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핥고 있었다. 그루밍하는 순간에는 방해하면 안 되는 것이 고양이들 사이에서의 룰일지도 모른다. 사람인 나로서는 고양이들의 규칙을 모르기에 언제나 조심스럽게, 탐색하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 나는 까망베르씨의 그루밍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책상의 한 구석에 몸을 기대 엎드리고는 눈을 감았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틈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조용히 찰삭대는 파도소리가 들어왔다. 


눈을 감은 채로 나는 내가 고양이처럼 내 몸을 그루밍하는 상상을 했다. 사람이 개인위생관리를 고양이처럼 해야 한다면, 나는 떨어지는 유연성 때문에 한참 전에 이런저런 병에 걸려서 죽었을 것 같았다. 헤어진 여자친구라면 아마, 인류 최후의 생존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중학교 때까지 발레를 열심히 배웠었던 그 사람은 지금도 다리를 180도 찢을 수 있을 정도로 유연성이 좋았다.


나는 눈을 떠서 열심히 그루밍을 하고 있는 까망베르씨를 힐끔 보고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헤어진 사람의 생일을 챙길 건 또 뭐람. 뭐라 답장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아직 나는 메시지를 읽지 않은 상태였다. 고마워. 아니, 마침표를 찍는 거는 너무 사무적인가? 고마워 ^^, 아니 며칠 전에 헤어졌으면서 ^^는 좀 가벼워 보이는 것 아닌가? 이 시간에 안 자고 뭐해? 이건 이미 너무 질척거리는 느낌이 난다. 그냥 지금은 읽지 말고 한참 뒤에 고마워. 자고 있었어 정도로 보내는 게 적당할까? 


갑자기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이 들어왔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하늘은 주황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바다는 멀리서부터 금색으로 반짝였다. 바다에 떠있는 배들의 그림자가 흔들리며 길게 늘어졌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일출을 본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괜찮은 생일이잖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검은 봉지에서 귤을 몇 개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카메라 앱을 실행시켰다. 까망베르씨와 귤과 창 너머 보이는 해가 뜨고 있는 바다를 한 프레임에 담아 여러 장 찍었다. 동영상으로도 찍었다. 까망베르씨는 이제는 자신의 양 앞발을 핥고 있었다. 찍은 사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하마터면 인스타그램에 올릴 뻔했다. 헤어진 여자친구와의 오프라인 관계는 정리했지만 아직 인스타그램에서는 친구로 남아있었다. 아니,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못 올릴 건 또 뭔가. 헤어졌다고 궁상맞게 집구석에만 있으며 아무 사진도 올리지 않는 것보다야 혼자 지내는 생일이지만 최선을 다해 즐겁게 보내려 하는 것이 훨씬 건강하다. 


나는 인스타그램 앱을 연 다음 방금 찍은 사진을 선택했다.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은 말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속초, #바다, #귤, #고양이 #혼자맞이하는생일 같은 해시태그도 추가했다. 그리고 잠깐 고민 한 다음에 올리기 버튼을 눌렀다. 너무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좋아요 알림은 통 오지 않았다.


할 일을 다 이뤘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졸음이 밀려왔다. 평소에도 잠이 많던 난데 갑자기 밤을 새우고 새벽에 모르는 거리를 열심히 돌아다녔으니 피곤할 만했다. 아, 자기 전에 까망베르씨의 배를 만지면서 골골송을 듣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루밍에 너무 열심이라 도저히 방해할 수가 없었는 걸. 장판바닥은 난방때문에 뜨끈뜨끈했고, 몸을 누이니 갑자기 아득해졌다. 나는 손을 뻗어서 개어진 이불 위에 놓여있던 베개 하나를 겨우 가져올 수 있었다. 베개 안에는 솜이 아니라 무슨 도토리라도 들어있는지 작은 알들이 달그락거렸다. 하지만 내겐 불평할 힘도 없었다. 나는 베개에 머리를 누이고 몸을 웅크렸다.  


잠결에 나는 내 품으로 들어온 까망베르씨의 보드라운 털을 느꼈다. 따뜻한 몸이 규칙적으로 위아래로 들썩였다. 나는 까망베르씨의 배를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고양이들에게 있어서 배를 허락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상대를 신뢰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를 만질 만큼 충분한 신뢰를 쌓은 것일까? 무엇보다 나는 까망베르씨에게 약속한 다섯 개의 츄르 중 겨우 하나만을 내어준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금방 다시 잠들었다. 


꿈에서 나는 수염이 복슬복슬한 어부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풍랑을 멈춰 줄 것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어부들은 하나같이 몸이 다리를 180도로 찢을 수 있을 만큼 유연했다. 고무로 된 작업바지가 찢어질까 봐 나는 조마조마조마했다. 내 유연성은 꿈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끔찍했다.



4


일어나 보니 전 여자친구는 인스타그램의 내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러놨다. 반쯤 잠에 잠긴 채로 그걸 보니 왠지 용기가 솟아올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자고 있던 까망베르씨를 깨우고는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그리곤 그중에 제일 귀엽게 나온 사진 하나를 아무 설명 없이 전 여자친구에게 보냈다. 폰을 손에 잡고는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귀여운 고양이의 사진은 언제나 반칙 같은 거니까. 어디야? 누구 고양이야? 생일 잘 보내고 있는 것 같네? 나도 바다 보고 싶다. 머릿속에서 전 여자친구가 나에게 보낼 법한 답장들의 수많은 예시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지만 숫자 1이 사라졌음에도 답은 오지 않았다. 


까망베르씨는 나에게 배를 허락했다. 나는 부드러운 배를 만지며 답례로 가다랑어 맛 츄르를 주었다. 그리고는 귤 다섯 개를 까먹으며 조업을 마친 배들이 항구로 돌아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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