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임스
남산의 중턱에 소월길이 있다. 남대문에서 시작해서 남산을 반 바퀴쯤 돌아 한남동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혼잡통행료를 받는 남산 1, 3호 터널을 피해서 을지로, 명동에서 이태원이나 한남동으로 넘어올 수 있는 길이라서 언제나 차가 많이 다니지만,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파노라마처럼 넓게 볼 수 있어서 드라이브 코스로도 인기가 좋다. 늦은 밤이나 새벽에는 삐까번쩍한 슈퍼카들도 자주 지나다닌다.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을 때 그런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언제나 제임스를 바라봤다. 그러면 제임스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말한다. „우르칸이에요“
엔진의 배기음 소리만으로도 제임스는 그게 어떤 메이커의 어떤 모델인지 맞출 수 있다. 내가 듣기에는 다 비슷한 두다다, 부아앙, 슈와앙인데, 그걸 듣고 척척, 포르셰 911 다, 이번엔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다, 낯선 모델명들을 줄줄이 읊는다.
제임스는 영국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다. RCA, 왕립 예술대학. 왕립이라니 멋진 이름이다. 캠퍼스 어딘가엔 여왕의 동상이라도 서있고, 우등 졸업생에게 주는 상장에는 여왕의 밀랍 실링이 붙어 있을 것 같다. 제임스에 따르면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단다.
제임스가 첫 출근을 하기도 전에 이미 소문이 회사에 퍼졌다. 새로 들어오는 직원이 막 RCA를 졸업한 사람이라고. 그런 좋고 비싼 대학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 왜 우리 회사에 지원한 것일까? 어떤 사연이 있기에 그 많은 대기업이나 잘 나가는 디자인 에이전시 대신 우리 회사에서 일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 여러 가설이 있었다. 그중 유력한 가설에 따르면 제임스는 한국의 유력 대기업의 자제인데, 장차 가업을 잇기 위해서는 한국의 밑바닥에서 굴러보면서 하층민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훈육법에 따라 우리 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지금 그 사람에게 잘해줘야 나중에 그가 그룹의 후계자로 정식 인정을 받았을 때 덕을 볼 수 있다며 우린 호들갑을 떨었다. 무엇보다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재벌 2, 3세들은 다들 잘생겼잖아.
제임스는 디자이너로 일한 경력이 없는, 막 대학교를 졸업한 신입이었다. 이 회사에서 이제 3년 차가 되어가는 내가 제임스의 사수가 되었다. 제임스는 비어있던 내 바로 옆자리에 자신의 짐을 풀었다. 제벌 2 세형의 얼굴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나름 훈남이잖아. 책상을 정리하는 제임스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작고 동글동글한 얼굴에 피부는 잡티 하나 없는, 매트한 웜 톤이었다. 겨울이었기에 제임스는 목까지 올라오는 니트를 입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가 곧고 넓은 어깨와 탄탄한 상체를 가졌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의 디자인 센스는 영 꽝이었다. 색이나 모양 같은 스타일이 이미 정해진 상황에서 몇 개의 아이콘을 추가로 그리는 일 같은 간단한 업무에도 제임스는 헤맸다. 그가 만든 아이콘들은 바스키아의 페인팅 작품들 같았다. 로고의 시안을 만들어보는 일을 시켰을 때에는 반나절만에 무려 열다섯 개의 시안을 만들었다고 하여 우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지만, 그 시안들의 떨어지는 완성도에 우리는 더 깜짝 놀라야 했다.
하지만 제임스는 단순하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때까지 제임스는 지치지 않고 반복해서 새로운 안을 만들었다. 발전 속도가 조금 더딘 감이 없지 않았지만.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괜찮은 삶을 이루려면 타고난 재능보다는 꾸준함과 쉽게 질리지 않는 성격, 어떤 종류의 둔감함들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제임스에 대해 오지랖 넓은 걱정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만든 시안을 다시 다듬느라 야근이 길어질 때면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듣자 하니 회사가 제임스를 뽑은 이유가 따로 있다고 했다. 유럽으로 판매되는 청소기의 마케팅 마테리얼들을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새로 맡게 되었는데, 일정상 추후에는 유럽 법인들의 마케팅 담당자들과 화상회의도 잡혀 있었다. 아마도 제임스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멋들어진 그의 영국식 영어 실력을 뽐내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제임스는 유학파라기엔 너무나 구수했다. 생김새며 옷차림이며 말투까지 미끌미끌한 버터의 느낌이라곤 전혀 없었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가면 청국장과 뚝불 두 메뉴만 번갈아가면서 시켰다. 레.퍼.런.스. 톤.앤.매.너. 커.뮤.니.케.이.션 같은 영어 단어들을 말할 때에도 혀를 굴리지 않았다. 가끔은 특이한 억양을 쓰는 것 같다는 인상도 줬는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지방에서 쓰는 사투리처럼 들렸다. 대체 영어를 잘 하기는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제임스가 학력을 허위로 기재한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그런 거짓말을 쳐 가면서까지 우리 회사에 들어와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또 한 번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추론해보았다. 이번에는 납득이 가는 가설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시안들을 정리해서 예약 발송까지 마치고 나니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사무실에 남아있는 사람은 나와 제임스 말고는 없었다. 솔 선배가 자신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한 게 한 삼십 분쯤 전이다. 우리는 컴퓨터를 끄고 히터도 끄고 옷을 챙겨 입은 다음 밖으로 나와서 도어록을 닫고, 잘 잠겼는지 확인까지 했다. 일 이주쯤 전에 옆 건물에 도둑이 들었다고 한 뒤로 우리는 부쩍 문단속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회사에 맥북프로만 10개가 넘는다. 다 챙겨가서 중고로 팔아넘기면 못해도 천만 원은 너끈히 벌 수 있었다. 소문으로는 서울 어딘가에는 디자인 회사만을 골라서 터는 도둑들도 있다는 모양이었는데, 수입 디자인 서적을 방문 판매하려는 양 낮에 사무실에 들어와서 구조를 훑어보고는 잠입로를 알아낸 다음 모두가 퇴근한 뒤에 들어와 비싼 노트북들만을 훔쳐간다고 했다.
„선배, 무슨 시안이 될 것 같아요?“
401번 버스를 기다리며 제임스가 물었다. 11월의 날씨는 추웠고 말할 때면 하얀 입김이 나왔다. 나는 방금 보낸 시안들을 생각했다. 새로 출시될 단백질 보충제에 사용될 로고 시안은 모두 네 개였다. 세 개는 내가, 다른 하나는 제임스가 만들었다.
„사실 네 번째 시안이 마음에 들긴 하는데, 아무래도 첫 번째 시안을 고르겠지 “
클라이언트의 요청은 명확했다. 전문적이면서 파워풀하게 보일 것. 시장조사를 하면서 모은 다른 모든 단백질 보충제들의 로고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방향으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두께가 있는 금속 재질로, 검은 배경 위에 큼지막하게. 로고만 놓고 보면 그 어느 보충제도 다른 것들과 구분되지 않았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시안을 우리는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따라 디자인했다. 다른 제품들의 로고들과 비슷한 방향이지만, 더 파워풀하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기도 하지만 금세 우리가 만든 로고보다 더 파워풀해 보이는 로고가 등장할 것 같았다. 제임스가 만든 네 번째 시안은 혼자 좀 달랐다. 재질감도 두께도 없었다. 두꺼운 보드 마커로 대충 갈긴 듯한 글씨로 단백질 보충제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언뜻 보면 러쉬의 느낌이 나기도 했다. 적당히 세련되었고, 적당히 위트 있었으며, 무엇보다 다른 모든 단백질 보충재들의 로고와는 달라 보였다. 다듬을 곳은 아직 많았지만 첫 시안으로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오늘은 꼭 오늘 안에 퇴근하고 싶었다.
„그거 제가 만든 건데“
„그래서, 뭐,“
„아뇨 뭐 그렇다구요“
제임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단순한 사람이다. 나는 좀 꼬여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사람을 보면 꼭 괴롭히고 싶어 진다.
„앗 참, 너 그거 모르지. 우리 회사에서 이거 유튜브 광고도 진행할 건가 봐 “
„저희 회사 그런 거도 해요?“
„응 종종. 물론 제작은 외주 맡기지만, 기획이랑 진행, 섭외 등등은 우리가 맡아서 하기도 해. 그래서 네가 하나 더 해줄 일이 있거든.“
„뭔데요?“
„너 뉴트로지나라고 화장품 브랜드 알아? 왜 광고가 끝날 땐 항상 네이티브 스피커가 과장된 억양으로 뉴트로지나~ 라고 말하는.“
„그거 뭐예요. 잘 모르겠는데요?“
„너 무슨 영국에서 태어나서부터 쭉 살다 온 사람인 것처럼 말하네. 어떻게 그걸 모르지? 아무튼, 그거처럼 우리 유튜브 광고 끝에도 누군가가 제품의 이름을 읽어주는 게 들어갈 거야. “
내 말을 듣던 제임스가 중간부터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안 해요. 어차피 미국식 영어 발음 저는 잘 못하는걸요.“
„요즘 촌스럽게 어떤 광고에서 미국식 영어를 쓰니. 대세는 영국식 영어야. 컴퍼비치, 콜린 퍼스. 어 컵 오브 워터 플리즈. 응?“
„…영국식 영어는 그런거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한번 도전해봐. 당연히 네 목소리가 사용되면 돈도 받는거지.“
„… 정말요?“
걸렸다 요놈.
„당연하지. 하지만…“
나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척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클라이언트 측의 대리님 조카가, 영국에서 3년인가 살았대. 대리님은 그 조카에게 일을 주고 싶은가 봐. 이미 가녹음도 해봤더라고. 그런데 내가 들어보니 좀 아닌 거야. 영국 느낌이 잘 살지 않더라고. 너도 알잖아. 한국에서 배우는 영어는 다 미국식인데, 고작 3년 살았다고 갑자기 미국식 억양이 영국식으로 바뀔 수는 없잖아. 하지만 너는…“
„저는 영국에서 8년 살았죠.“
물었구나 요놈.
„그래서 그런데, 네가 영어로 말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는 거 잘 알지만, 그래도 내가 한 번이라도 들어봐야 대리님한테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회사 디자이너가 훨씬 더 정통 영국식 영어를 구사한다고?“
제임스는 잠깐 고민하는 눈치였다. 주변을 둘러보고 우리 외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 한 뒤 제임스가 체념한 듯 말했다.
„알겠어요…. 흠흠…“ 목을 한 두 번 가다듬고 나서 제임스는 곧바로 우리가 로고를 만들고 있는 단백질 보충제의 이름을 완벽한 영국식 악센트로 말했다.
„뉴트리션 플래티넘 프롬 네이처 하이드로 프로테인 아이솔레이트“
한남오거리에서 내려 제임스와 헤어진 뒤 512번 버스로 갈아탄 나는 자리에 앉아마자 솔 선배에게 카톡을 보냈다. „제임스 영어 하는 거 들음“ 선배에게 바로 전화가 왔다. 집까지 가는 동안 심심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