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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부르크의 최중원 Nov 19. 2020

프로 디자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 AE님 

AE님은 키가 작다. 무척 작다.  덩치도 작다. 자리에 앉아서 맥북프로를 펼쳐놓고 있으면 몸이 노트북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싶겠지만 사실이다. AE님의 자세가 무척 특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지금 책상 위에 앉아있다면 한번 이 자세를 따라 해 보자. 우선 모든 손가락을 당신이 호랑이 흉내를 내면서 조카와 놀아줄 때처럼 오므린다.  그 상태로 팔꿈치는 몸통의 옆에 붙이고, 아래팔을 수직으로 세운다.  그러면 오므려진 양 손이 양 볼 언저리까지 올라온다. 여자 아이돌이 고양이 흉내를 내며 „앙’“ 할 때처럼 말이다.  그다음에는, 자세를 유지하면서 양팔과 가슴에 책상이 닿을 때까지 몸을 그대로 숙인다.  노트북이 책상에 있다면, 그리고 당신이 마동석이나 서장훈이나 최홍만이 아니라면, 당신도 이런 식으로 노트북 뒤로 얼추 숨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적어도 한 번씩은 AE님의 자세를 따라 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적어도 다섯 번은 해보았다. 노트북의 스크린과 눈의 거리가 15cm 길이의 자보다도 가까워진다. 레티나 스크린의 픽셀이 보일 것만 같다. 타이핑하기에도 너무 불편하다. 이 자세로는 마우스를 쓰는 것도 불가능한데,  마우스를 잡기 위해 오른팔을 바깥쪽으로 뺄 경우 상체의 하중이 왼팔에만 너무 쏠려서 금세 아파오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AE님은 마우스 없이 트랙패드만으로 모든 일을 다 해낸다.


AE, Account Executive. 우리는 „에이이“로 읽는다.  원래는 광고 대행사의 직책 중 하나다.  클라이언트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프로듀서의 역할도 맡는다. 클라이언트와의 관계 형성에 주력해서 일을 잘 따오는 „영업형“ AE가 있는 반면 일들의 모든 요소들을 잘 관리하고 구성원들을 잘 케어해서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끄는 „관리형“ AE가 있다고 하던데, 우리 AE님은 100% 관리형이다. 성격이 날카롭고 듣기 좋은 말을 잘 못하는 터라 클라이언트와의 통화는 언제나 찬바람이 쌩쌩이다.  유대감이나 친분 같은 것도 쌓지 않는다. 그렇기에 AE님이 광고회사에 다닐 적에는 일을 정말 깔끔하게 잘 처리함에도 불구하고 클라이언트들에 따라 호불호가 종종 갈렸던 모양이다.  


찬바람은 사실 회사 안에서도 여전하다. 나는 AE님과 사담 같은 것을 나눠본 적이 없다. 원래 AE님이 말수가 적은 편인 것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AE님에게는 회사 사람들과는 사적으로는 얽히지 않겠다는 원칙 같은 것이 있는데, AE님은 규칙을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스스로가 그어놓은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간혹 AE님의 입에서 마감 일정이나 클라이언트의 피드백, 또는 프로젝트의 우선순위 따위의 업무에 관련된 단어가 아닌 다른 것들이 나올 때가 있는데, 바로 그때가 내가 너무 사랑하는 순간이다. 말하자면 AE님은  대부분 시니컬하고, 보통 무자비하고, 종종 자기 비하적이며 가끔은 더럽기까지 한 유머들을 좋아하는데,  그런 이상한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통은 억누르면서 사는 모양이다. 하지만 비활성화된 상태로 잠들어있었던 AE님의 머릿속 유머 뉴런들을 깨우는 특정한 종류의 자극이 우리 회사에서는 종종 발생하고,  거기에 반응하여 깨어난 뉴런들이 섬광과 함께 새롭게 연결되고 나면, AE님은 머릿속에 완성된 문장을 발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회사 안에서 AE님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은 보통 팀장님이다.  40대 초반의 나이. 190cm 정도의 큰 키를 가졌음에도 BMW 미니를 타는 사람이다.  멋에 살고 멋에 죽는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한 번은 우리가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팀장님이 미팅이라도 가는지 조그만 미니에 자신의 몸을 구겨 넣고 있는 것을 보았다.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빨아올린 뒤에 AE님이 갑자기 외쳤다. 

„팀장님, 동물원에 팔려가는 기린 같으세요!“

그 뒤로 우리는 모두 팀장님을 기린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AE님의 유머는 소재나 내용에 있어서도 한계가 없지만, 발화되는 상황과 대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한계가 없다.  그런 점에서 분명히 AE님은 똘기가 충만한 사람이다.

한 번은 우리가 보낸 옥외광고 시안을 보고 클라이언트가 이런 회신을 보냈다. 

„시안 잘 봤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생각했던 방향이랑은 좀 다르네요. 마케팅 팀에서 보내드렸던 애플과 무인양품 광고 레퍼런스들은 확인하셨는지요. 제품 개발팀에서도 열심히 만든 제품이 광고에서는 너무 못생기게 나왔다고 난리입니다. 정해진 마감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걱정이 많이 됩니다. 제가 팀장님과 이야기를 해 봐야 할까요?“


메일의 수신자 목록에는 AE님 외에도 내가 껴 있었다. 시안을 만든 게 나였다.  웃기게도 팀장님의 이메일 주소도 이미 CC 목록에 들어있었다. 내가 메일을 읽고 걱정스럽게 AE님의 자리로 왔을 때 이미 AE님은 예의 그 자세로 앉아서 분노의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피드백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저희 팀장님께는 제가 말씀드리는 게 낫겠습니다. 팀장님의 취향이 좀 올드한 것 같으니 웬만하면 실무 작업에서는 배제해달라고  저번 미팅 때 부탁하셨는데요. 그 말씀을 들었을 때는 제가 참 난감했었는데,  그때 워낙 강하게 말씀하셔서, (팀장님껜 죄송하지만) 그렇게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리님께서 팀장님께 연락하신다면, 팀장님께서는 직접 만드는 것을 좋아하시기에 작업의 일정 부분을 맡으시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어떻게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이 부분 팀장님께 연락드리기 전에 한번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화면 위에 쓰인 AE님의 답장을 읽고,  화면 위의 받는 사람들 목록에 올라 있는 사람들을 확인한 뒤에 놀라서 말했다. „AE님, 여기에 이미 팀장님이 CC 되어 있는데요?“

„알고 있어요.“ AE님은 벙쪄 있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하더니, 곧바로  망설임이라곤 하나도 없이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몇 초 두에 과장된 톤으로, 연극을 하듯이 왼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 AE님이 잠 짓 놀란 듯 말했다.  „어머,“ 그리고는 다시 새로운 메일 보내기 창을 열었다.  이번에는 수신인을 입력하는 창에 대리님 한 명의 주소만 추가하더니, 곧바로 타이핑을 시작했다.

„대리님, 팀장님과 이야기를 해봐야 할지 물어보셔서, 설마 같은 메일에 팀장님을 CC로 넣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전체 답장으로 보내버렸네요…“


벌떡, 하고 반대편에 앉아 있던 팀장님이 일어났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팀장님은 쿵쿵거리며 우리 옆을 지나서 회사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사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조용히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곤 AE님을 힐끔 바라봤다. AE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PPT를 열어서 뭔가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하지만 AE님의 왼쪽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나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나는 이럴 때마다 진심으로 AE님과 친해지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오른다. 하지만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종종 AE님이 좋아하는 바나나맛 우유를 사서 몰래 책상위에 올려놓는 소극적인 접근법만 시도해볼 뿐이다. 담배를 피고 돌아온 AE님이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진 바나나 우유를 본다. 언제나처럼 AE님은 누가 올려놨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하다 못해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고, 초록색 알루미늄 호일 뚜껑을 열어서 시원하게 원샷을 한다. 정말 닮고 싶은 쿨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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