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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부르크의 최중원 Nov 07. 2020

프로디자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 회사에 똘아이가 있다

클라이언트와의 통화가 길어지는 바람에 제일 늦게 회의실로 들어왔더니  모두가 이미 자리에 앉아있었다. 좁은 회의실의 공기는 텁텁했고 알수 없는 퀘퀘한 냄새도 났다. 빈 의자는 없었다.  자리를 비켜주려는 막내 인턴의 어깨를 눌러 다시 앉힌 다음 나는 영차, 하고 책상 위에 올라와 앉았다. 노란 삐약이 슬리퍼를 벗고 양반다리로. 오늘의 양말은 내 컬렉션 중에서 꽤나 예쁜 편인지라 나는 조금 의기양양해서 내 양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뭐예요? 그건?" 하고 제임스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임스 정은 나보다 일 년쯤 뒤에 들어온 디자이너다. 영국에서 유학할 때 사용했던 이름이 제임스라는 것을 알게 된 뒤로 아무도 그를 한국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솔직히 나는 까먹은 것 같기도 하다.


"이거 어때, 귀엽지?"

나는 제임스 쪽으로 한쪽 발을 뻗은 뒤에 발가락을 꿈틀거렸다. 양말에 새겨진 형광색의 기다란 뱀들도 꿈틀거렸다.

"아 정말 징그럽게"

"어, 선배의 양말 보고 징그럽다니"


"은우씨!"

대표님 1이 고개를 돌려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우리 회사에는 대표님이 두 분 있다. 둘은 결혼한 사이다. 한 때는 둘이서 함께 디자이너 듀오로 이름 꽤나 날렸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같이 점심도 잘 안 먹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대표님 1의 옆에 앉은 대표님 2의 뒤통수를 힐끗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손이 베일 것 같이 날카로운 칼 단발. 길게 내려온 은색의 귀걸이도 보였다. 대표님 2는 이런 작은 소동 따위에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고개를 잘못 돌리면 그 칼 단발에 베일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대표님 1의 머리는 매가리 없이 나풀거리는 게 꼭 우유부단한 주인을 닮았다. 탈모도 진행되고 있다.


머리숱이 적어지는 사람에게는 나이스 하게 대해줘야 한다. 

"알겠습니다. 자중하겠습니다."  대답한 나는 양반다리를 하고 고쳐 앉은 뒤에 제임스를 향해 한번 더 표정을 찌푸렸다. 제임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투피스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가 들어와서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그 사람은 회의 테이블의 맨 앞에 놓인 노트북에 유에스비를 하나 꽂더니, 몇 번의 클릭으로 회의실의 큰 스크린에 귀여운 고양이 사진을 띄우는 데 성공했다.  사진 밑에는 "직장 내 성희롱 교육" 이라고 적혀있었다. 



일 년에 한 번씩, 한 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한 회사는 필수적으로 직원들이 직장 내 성희롱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 그 교육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격을 갖춘 전문 강사들만이 가능하다. 강사들이 교육을 공짜로 해주는 것이 아니니 회사 입장에서는 비용이 드는 일이다.  


종종 이 푼돈 같은 비용도 아끼고 싶어 하는 회사들이 있는데, 이를 타깃으로 삼아 직장인들에게 자사의 금융 상품을 홍보하고 싶어 하는 보험회사들이 틈새시장을 개척해냈다.  성희롱 예방 교육에 드는 비용을 보험회사가 부담하고 대신 교육이 끝난 다음에 자사의 직원이 직원들에게 보험 상품을 홍보하는 것이다. 


강사님은 능숙하게 교육을 진행했다. 태어난 뒤로부터 쭉 30년이 넘게 직장 성희롱 예방 교육에만 매진한 것 마냥 모든 것에 막힘이 없었다. 어떤 행위가 성희롱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지, 성희롱을 당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성희롱 행위자로 지목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의 내용이 여러 귀여운 동물 사진들과 함께 제시되었다. 


성희롱이라, 우리 회사에 그런 문제가 있었나? 나는 스크린에 띄워진  랫서 판다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예전에 회식자리에서 한번 대표님 1이 성적인 뉘앙스의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  건너편에 앉아있었던 대표님 2가 바로 대표님 1의 머리를 쥐어박었다.  집에서 혼이라도 난 모양인지 며칠 동안 대표님 1은 대표실 밖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농담이 뭐였더라. 좀 더럽고 재미도 너무너무 없었는데.  그 일 말고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나는 챙겨 들어왔던 노트의 제일 앞장을 펼쳤다.  나는 얼마 전부터 우리 회사의 좋은 점들을 여기에 적어보고 있었다. 


1 근처에 맛있는 밥집이 많다. 

2 대표님 1이 게으르다.

3 회사 근처에 길고양이들이 많다.


직장 내 성희롱이 없다를 4번으로 추가하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없어야 하는 거잖아.  나는 노트의 맨 뒷장을 펼쳤다. 빽빽하게 꽉 차 있었다. 여기는 회사의 나쁜 점을 적는 페이지다.  이 페이지에 적힌 내용들은 다음에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니까 오늘은 일단 넘어가 보기로 한다. 가까이에 보는 눈이 너무 많기도 하고. 


"혹시 질문이 있으신가요?"

하고 마지막으로 강사님이 물었다. 


"저희 회사 이야기는 아니고, 친구 회사의 이야긴데요." 하고 AE님이 손을 들고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그 회사는 대표님 두 분이 부부인데요, 그런데,"

AE님이 말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봤다. 나와도 눈이 마주쳤다. 설마 그 이야길 할 셈이야?

"부부 중 어느 한쪽이 사랑을 나누고 싶을 때, 뭐 그걸 은근한 방법으로 신호한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친구가 우연히 그 신호를 알아버렸대요. 대표님들이 회사에서 신호를 주고받는다고 하더라고요"

"…네?" 강사분은 조금 황당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자신의 귀걸이를 계속 만지작거린다던지, 자신의 안경테를 세 번 톡톡 친다던지, 신호는 주기적으로 바뀐다는 것 같지만요."

나는 대표님 1과 2의 뒤통수들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대표님 1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금색 안경테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친구분은 그걸 어떻게 아셨대요? "

"그러니까, 그 신호를 주고받으면 두 대표님이 각자 오 분 십 분의 간격을 두고 회사를 나가서 두어 시간 있다 돌아오신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우연히 알게 됐는데, 그 뒤로부터 자꾸 신경 쓰여서. 대표님들의 성생활 같은 거 알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도 자꾸 알게 된다고"

"아.. 그건.. 저 같아도 곤란할 것 같네요. 성희롱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

강사님이 힐끔 대표님 1과 대표님 2를 번갈아 쳐다보고 바로 시야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보였다. 30년의 성희롱 예방 교육 강사 경력 중에서도 오늘만큼 당황스러운 일은 처음인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솔 선배를 바라봤다. 선배도 나를 보고 있었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지만 웃음을 참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잠깐 열고 솔 선배는 입모양으로 말했다. "완 전 똘 아 이"

 나도 완전 동의하는 바이다.  


어색한 분위기는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회의실 문 밖에서 기다리던 보험회사 직원이 똑똑 노크한 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교육시간은 다 끝났고, 이제는 보험 상품의 설명을 들을 차례였다. 대표님 1과 2는 이미 자신들은 보험을 많이 들었다며 손사래를 친 뒤에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보험회사 직원은 연금보험 상품을 소개하면서 자꾸 지금이 딱 시작할 타이밍이라던지, 복리의 신비한 힘이라던지, 몇 년간 얼마씩 부었을 때 얼마큼의 수익을 낼 수 있는지 같은 말들을 했다.  그래프와 숫자들이 가득한 PPT에서는 귀여운 동물들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사람은 정말로, 이 볼품없는 회사에 다니는 디자이너들이 연금보험에 돈을 부을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여기가 네이버나 카카오라면 또 몰라. 


나는 노트의 맨 뒷장을 다시 편 뒤에 네 번째 항목을 이렇게 적었다.

회사에 똘아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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