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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부르크의 최중원 Sep 25. 2020

베르크하인 방문기


함부르크로 이사온지 이제 일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 전에는 2년이 넘게 베를린에 살았다. 내가 베를린에 산다고 하면 흥을 좀 즐기는 지인들이 꼭 물어보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베르크하인에 가봤냐는 것이었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클럽. 테크노 음악과 LGBT의 성지. 


시끌벅적하고 사람이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노친네 취향인 우리에게는 별 신기한 공간이 다 있네, 정도의 느낌으로 다가왔던 곳.


워낙 들어가기가 어렵기도 하고, 들어가도 사진촬영은 엄격하게 금지된다. 게다가 베를린의 자유로운 성문화가 극대화되는 곳이기도 하기에 이런저런 전설같은 경험담들만이 인터넷을 떠돌 뿐이다. 


하지만 이런 베르크하인도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장기간 문을 닫게 되었다. 유행의 초창기에 베를린의 어느 클럽에서 집단 감염이 일어나기도 했고, 때문에 베르크하인을 비롯한 베를린의 전체 클럽씬이 모두 셧다운 된 것이다. 그리고 어느날 우연히 나는 인터넷에서 베르크하인이 한정된 기간동인 미술관으로 탈바꿈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것도 예전에 방문했을때 컬렉션들이 마음에 쏙 들었던 베를린의 미술관 잠롱 보로스와 함께.  


http://studio.berlin  :여기서 예약할 수 있다. 자리가 남아있다면 


 예약에 성공하고, 겸사겸사 맛있는 아시아 음식들을 먹으러 2박 3일동안 베를린 여행을 다녀왔다. 특히나 베르크하인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에, 글로라도 적어놓지 않으면 분명히 다 잊어버리게 될 것이라서 기록으로 남겨본다.




Ostbahnhof에서 내려서 뭐 없는 삭막한 길을 걸어가다 보면 갑자기 이런 큰 건물이 나타난다. 원래는 화력발전소였다는 것 같았다. 코로나 이전의 밤에는 이 곳을 따라 긴 줄이 늘어서 있고, 입뺀을 먹은 수많은 사람들이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을 것이다. 


전시는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컨셉이었고, 인터넷을 통해서 사전 예약을 한 사람만이 가이드 투어의 형식으로 전시를 관람할 수 있었다. 뒤에도 말하겠지만 작품들의 양에 비해서 주어진 한시간 반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고, 언급도 없이 넘어가는 작품들도 꽤 많았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예상대로 우리와 함께 베르크 하인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범상치 않았다. 베를린의 힙스터들이 다 올거라는 우리의 예상은 얼추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한국과 베를린, 혹은 독일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나라의 힙한 곳에는 언제나 젊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얌전하게 차려입은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도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면바지에 체크셔츠를 입고 작은 백팩을 맨 노년의 커플 한쌍이 함께 서 있었다. 어쩌면 저 사람들도 코로나 이전에는 가죽바지를 차려입고 테크노 음악 아래서 춤을 추던 이 곳의 단골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해봤다. 실제로 베르크하인에는 정말 오래된 단골들도 많아서, 몸 좋은 할아버지들이 상의를 탈의하고 가죽 숏팬츠만 입은 채 춤을 추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고 했다.



*가이드 투어


시간이 되어서 우리는 티켓을 확인하고, 핸드폰 카메라에 스티커를 붙인 다음, 베르크 하인의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의 벽면부터 이미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한 팀은 15명 가량 되는 것 같았고, 우리의 가이드는 잠롱 보로스에서 온 어느 여자분이셨는데, 사이버네틱한 얼굴 가리개를 하고 있었다.


로비의 어느쪽 문을 열고 들어가니 천고가 높은 공간이 나왔다. 그리고 커다란 부표가 몇 가닥의 쇠줄에 묶여 천장에 매달린 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태평양에서 건져온 것이라 했다. 실제로 그 곳에 떠 있는 다른 부표에 달린 센서를 통해서 그 부표의 움직임을 받아온 다음에 그대로 움직이고 있다. 오늘은 바다가 잔잔하기에 이렇게 천천히 움직이지만 풍랑이 거셀 때는 엄청 거칠게 움직인다고 그랬다. 오, 이 전시, 처음 작품부터 뭔가 멋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우리는 그 부표를 여러 높이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한 층 위에는 그리 넓지 않은 홀이 있었고, 그 홀의 한쪽에는 DJ의 부스인 것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그 옆켠에는 기둥들로 구분되어 길쭉한 바가 있었다. 물론 DJ장비와 바의 술들은 다 비워져있었지만. 곳곳에는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런식이었다. 코로나 이전에 이 곳은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고 사람들이 가득 춤을 추는 공간이었다. 이 클럽의 단골이었던 예술가 누구는 그 시대를 그리워 하며, 댄서의 사진을 찍은 다음 그것을 실물 크기로 출력하고, 그 사진을 다시 구겨서 이곳에 놓았다. 바의 한쪽 벽에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도어맨인 그 사람(이름도 모른다)의 영상 작업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실제로 여러 종류의 작업을 하고 있다는 듯 했다. 


파노라마 바에는 창문 가리개가 없어서 자연광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클럽으로 이용될 때에는 이곳 역시 가려놨었다는 것 같았다. 넓찍한 공간에는 우선 종이로 만든 엄청 큰 꽃 한송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길다란 바 위에는 가죽 옷을 입고 이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이 역시 작품이었다. 벽에 붙어있는 사진들 또한 작품이었는데, 누워있는 남자의 털이 복실한 엉덩이(와 기타 등등)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클럽의 남자, 여자화장실에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화장실은 놀랄만큼 깨끗했고 낙서도 그라피티도 하나 없었다. 개관하기 전에 청소를 정말 열심히 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의 복층 공간에 설치된,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을 보고 나서는 가이드를 따라서 흡연하는 공간으로 향했다. 반투명한 재질의 외벽을 통해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이드가 말하길, 이곳이 이 건물 내에서 유일하게 자연광이 들어오는 곳이기에 일종의 "리얼리티 체크"를 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고 한다. 바닥에는 소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이빨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다음에 가이드는 우리를  "할레" 라는 공간으로 데리고 갔다. 이 곳은 베르크 하인의 수 많은 공간들 중에서도 규모가 제일 큰 곳인데,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열리지 않는다고,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운이 좋은 일이라고 설명했다. 말 그대로 공간은 광활했다. 비교하자면 성동구의 구민 체육관 정도의 매스는 되어 보였는데, 그만한 공간이 시멘트 벽과 시멘트 천장으로 둘러쌓여있었다. 천장에는 기능을 알 수 없는 구조들이 매달려있었는데, 옛 발전소의 흔적인 것 같았다. 이 건물이 발전소로 기능할 때에는 이 할레에 발전 터빈들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했다. 


이런저런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공간의 힘이 작품을 압도하고 있었다. 어떻게 말하자면 작품들이 힘이 없었다고도 볼수도 있겠다.


할레의 밑에도 천고가 낮은 공간이 있었고, 그 곳에서도 몇몇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할레를 나와서는 이런 저런 복도들을 거닐었다. 어느 나라의 폐허가 된 도시에 사는 개들을 찍은 영상 작품 앞에서 가이드는 우리를 한참이나 붙들어 두었다. 베르크하인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진가의 작업이라고 했다. 개는 귀여웠고 영상은 심심했다.


복도를 지나가자 다시 바가 나왔다. 이 클럽에는 바가 대체 몇 개인건지. 얇고 높은 기둥들이 촘촘히 서있는 바에는 기둥들마다 간접조명이 설치되어 있어서 세기말 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 곳에서도 영상작업이 하나 설치되어 있었는데, 가이드는 또 우리를 여기에 오랫동안 앉혀 두었다. 그리고 역시 영상은 재미가 없었다.  아무래도 한시간 반의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이곳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 같았다. 


그 바를 지나자 처음 들어왔던 로비가 나왔다. 베르크하인 가이드 투어는 이렇게 끝났다.



*몇 가지 단상들


작품수에 비해서 한시간 반의 관람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러다 보니 설명은 빈약해지고, 천천히 작품을 둘러볼 시간도 많지 않았다. 언급되지 않고 지나가는 작품들도 꽤 많았다.  작품 옆에는 작가 이름만 적혀있을뿐 작품의 이름이 무엇인지와 같은 최소한의 정보도 제공해주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작업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시대가 시대라서 그런지 여러 작업들이 "코로나로 인해 바뀐 세상" 에 대한 반응의 성격을 띄고 있었는데, 그들중 대부분이 충분히 탐구되지 않은 1차원적인 반사반응인 것처럼 느껴졌다. 


공간은 여러모로 대단했다. 그 큰 건물 안에 높이와 너비가 다른 공간들이 미로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거친 마감, 곳곳에 놓여진 소파들과 색색의 조명들. 처음에 이곳을 발견한 뒤에, 돈을 모아 이곳을 사고 하나씩 개조하면서 공간을 만들어갔을 누군가들을 생각하니 너무나 재미있었을 것 같았다.


풍문으로만 듣던 둥켈라움을 볼 수 있었다.


클럽애호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건물은 클럽보다는 갤러리로 쓰이는게 더 좋을 것 같다.



이제는 누가 베르크 하인 들어가 봤냐고 물어보면 자신있게 응! 이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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