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함부르크의 최중원 Sep 23. 2020

베를린, U7, K, 톰, 알레한드로



1

낯선 사람들이 낯선 냄새가 나는 곳에서 낯선 열차를 타고 내린다.  나는 베를린의 지하철 어느 역 승강장의 벤치에 앉아있다. 벤치의 엉덩이가 닿는 부분에는 검게 도장된 면봉 굵기의 철근들이 격자모양으로 겹쳐서 용접되어 있었다. 한 시간이 넘게 앉아 있었으니 내 엉덩이에는 버거킹의 그릴에 구워진 패티처럼 격자모양이 나 있을 것 같았다. 



2.

나는 K를 만나러 베를린에 왔다. K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다. 대학교 1학년 때 엠티에서 알게 되었으니 벌써 십 년이 넘은 인연이다. 라이프치히에서 열리는 출판 박람회 참석차 출장을 가는 김에, 며칠 더 일찍 날아와서  짧은 여행을 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 나는 바로 K에게 연락을 했다.  K는 반가워하면서 자기 집에서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된다고 그랬다. 


<마침 방도 하나 비는데 잘 되었다. 남자친구랑 같이 살거든. 유쾌한 사람이야. 스페인 사람이라서 요리도 엄청 잘해. 너 오면 신나서 이것저것 막 대접해줄걸?>

오랜만에 듣는 K의 목소리는 여전했고 조금 들떠 있었다. 스페인 사람인 남자친구라. 내 머릿속에 피부가 잘 그슬린, 콧수염을 깔끔하게 기르는, 몸이 탄탄하지만 키가 좀 작은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K를 좋아했었지만 그것도 벌써 8년 전의 이야기다. 우린 어찌어찌해서 친구로 남아있을 수 있었고, 그 뒤로 각자 서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 것도 몇 번씩이었다. K의 전 남자친구들 중 몇몇을 만나본 적도 있었다. 머릿속에 각기 다른 얼굴들과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K와 남자친구가 함께 사는 집에 머물고, 그 사람이 해주는 음식을 얻어먹을 생각을 하니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은 묘한 일 투성이고, 그 모든 것들을 신경 쓰며 살기엔 피곤한 일이었다. 나는 염치 불고하고 삼박 사 일간 신세를 지겠다고 말했다. 그 정도의 민폐는 끼칠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전화를 끊기 전에 그 사람의 이름을 물어봤다. 


알레한드로. K와 나보다 다섯 살 어린, 이제 막 20대가 꺾인 친구. 나는 오가던 길에 서점에 들러  스페인어 여행 회화책을 펼쳐놓고 몇 가지 인사말을 외웠다. 무초 구스또, 부에노스 디아스, 무이 비엔! 그러나 페루로 이주한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바람에 K는 알레한드로와 함께 갑작스럽게 베를린을 떠나야 했다. 나는 그 사실을 뮌헨 공항에 내렸을 때 알게 되었다.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공항의 와이파이를 잡았더니 K의 음성 메시지가 와 있었다. 


<진짜 미안해. 나는 곧 알레한드로와 함께 페루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 그 대신 친구에게 집 열쇠를 맡겨놨으니, 그 친구에게서 열쇠를 받은 다음에는 내 집에서 머물다 가면 돼. 그리고 하나만 부탁할게, 우리가 너무 정신없이 나오는 바람에 신경을 못썼는데, 집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거든? 다른 것 말고 밥이랑 물만 챙겨주고, 화장실 한 번만 치워주면 돼! 우리는 페루에서 사일 정도 머물고 돌아올 예정이야. 네가 삼박 사일 동안 머물 거라고 했으니, 어쩌면 잠깐이라도 볼 수도 있겠다. 그랬으면 좋겠어. 열쇠를 맡긴 친구 이름은 토미인데, 걔는 그냥 너무 웃겨. 그렇게 웃긴 독일인을 나는 본 적이 없어. 그런 친구가 U7을 몬다니 BVG도 제정신이 아니지. 우리 근처에 사니까 연락하면 열쇠를 받을 수 있을 거야. 걔 번호는 0176 3451 ….>


음성 메시지는 거기서 뚝 하고 끝났다. 전화번호가 저렇게 짧을 것 같지는 않았다. 녹음된 번호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독일어로 뭐라 뭐라 말하는 녹음된 목소리가 들리고는 금방 연결이 끊어졌다. 아무래도 음성메시지 녹음 역시 중간에  끊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K에게 전화를 해 봤지만 핸드폰이 꺼져있었다. 시속 400km/h로 하늘을 날고 있는 중일 것이었다. 베를린에서 페루까지는 직항으로 간다고 해도 여덟 시간은 족히 걸리는 길이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나는 우선 베를린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3.

베를린 공항에 도착했을 때에는 오후 다섯 시쯤이었다. 가을의 베를린은 쌀쌀했다. 오가는 사람들은 다들 바로 쭉슈피체 등산이라도 갈 수 있을 차림이었다. K의 전화기는 아직도 꺼져있었다. 그의 집 주소는 이미 받아 둔 상태였지만, 그곳에 가봤자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우선 시내 어디의 스타벅스로 향했다. 메시지를 남겨둔 상태이니 K가 페루에 도착한다면 나에게 연락을 줄 것이었다. 우선 두어 시간은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스타벅스가 일곱 시에 문을 닫을 때까지 K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다시 전화해 봤지만 여전히 꺼져 있었다. 아직도 대서양 위인 모양이었다. 방금 초코 머핀을 하나 사 먹어서 우선 배는 채웠지만, 문제는 오늘 저녁에 잘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 호텔이나 예약하려고 호텔스닷컴 앱을 여는 순간,  K가 나에게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를 챙겨줄 것을 부탁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K는 옛날부터 고양이를 좋아했다. 언젠가 한번 길에서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주워서 키웠던 적도 있었다. 까만 고양이였다. 그 고양이는 계속 시름시름 앓았다. 숨을 쉴 때마다 작은 피리소리가 났다. 의사 선생님은 엑스레이를 찍어보더니 선천적으로 폐가 기형이라고, 건강하지 않아서 어미도 버린 것일 거라고 그랬다. 오래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랬고, 그 말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때 나는 K와 항상 붙어 다녔었고, K를 좋아하고 있었다.  K가 동네 놀이터 구석 풀숲에 새끼 고양이를 묻고는 슬퍼했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었다. K는 내 어깨에 기대어 울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바로 타이밍이었는데, 나는 왜 고백을 하지 않았었을까.


어떻게 해서든 토미를 만나서 열쇠를 받아 내고야 말겠어.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4.

나는  베를린 지하철을 운영하는 BVG라는 곳에 전화를 걸었다.  고객센터의 직원은 다행히 영어를 잘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직원의 개인 정보는 알려드릴 수가 없다고 그랬다. 나는 차근차근히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다시 한번 부탁했다. 손님, 상담원이 말했다. 저도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고, 지금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다음으로 나는 구글 맵을 열어 U7가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 지를 살폈다. 예상대로 북쪽 끝과 남쪽 끝에 하나씩, 차량기지 같아 보이는 시설이 보였다. 그쪽으로 가면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기관사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토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우선 남쪽 끝의 루도우로 향했다. 하지만 차량기지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훨씬 더 보안이 삼엄한 곳이었고, 경비원은 영어를 하지 못했다. 모두가 차를 타고 들어가거나 나와서 말을 걸어볼 수도 없었다. 


장거리 비행 끝에 큰 캐리어와 백팩을 들고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던 바람에 이제는 나도 지쳤다. 머리엔 점점 기름이 지고 있었다. 해는 진지 오래였고 허기도 밀려왔다. 구글 맵으로 찾아보니 K의 집 근처 헤어만슈트라세역 위쪽에 식당이 많아 보였다. 그 쪽으로 가서 뭐라도 사먹을 생각으로 헤어만슈트라세 역에 내렸다.


역의 플랫폼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서서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노숙자들인 것 같았다. 몇몇은 유럽 지하철 역의 노숙자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를 법한 딱 그런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다른 몇몇은 머리도 단정하고 옷차림도 좋았다. 얽히고 싶지 않은 마음에 빙 돌아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중 한 명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웨얼 아 유 프롬?> 영어 발음이 나만큼 후졌다. 

<아임 프롬 코리아>.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은 백발에 중키의 할아버지였다. 얼굴에는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했다. 특이한 것은 그의 옷차림이었다. 그는 영화에서 봤음직한 공산권 국가들의 군복처럼 보이는 카키색 상하의를 입고 있었다. 군화를 신고, 머리 위에 쓴 베레모에는 붉은색 바탕에 금색의 금속으로 되어있는 배지가 달려있었다. 

<노쓰?> 할아버지가 되물었다.

<사우쓰> 하고 내가 대답했다. 북한이라니.


내 대답을 들은 할아버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둡게 변했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 뒤 고개를 숙이더니, 뭐라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독일어라고는 구텐탁밖에 모르는 나였지만, 그래도 저 말들이 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옆에 서 있던 고딕풍의 옷을 입은 여자가 말했다. <미안, 영감이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가 있어서. 여기에 예전에 공산주의 정부가 있었거든> 

<그런데, 나 형씨 아까 다른 역에서도 봤는데. U7을 열심히 타시네. 호텔을 못 찾았소?> 내 옆에 놓인 커다란 캐리어를 힐끔 보며 다른 남자가 말했다. 날씨에 맞지 않게 반바지에 나시티 차림이었는데, 우락부락한 왼쪽 팔뚝에는 헬로 키티의 앙증맞은 얼굴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아, 그게, 사람을 찾고 있어요. 토미라고, 이 라인의 지하철을 운전하는 것 같은데…>

<토미...? 그 토미인가? 그 재미없는 농담 자주 하는 친구?> 헬로 키티 문신을 한 아저씨가 돌아보며 물었다. 

<아 그 멀대 같은 친구> 하고 고딕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맞장구쳤다.

<아세요?>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드디어 보는 듯한 기분으로 내가 되물었다.

<그럼, 우리는 U7을 운전하는 사람들 모두 다 안다구. 새로 이 라인에 투입되는 첫날에 맥주를 사들고 우리에게 인사 오는 게 전통이라니깐> 자랑스러운 듯한 말투로 헬로키티 문신을 한 아저씨가 말했다.

<뭣도 모르는 외국인 좀 그만 놀려요. 정말로 믿겠다.> 고딕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나무라듯이 말했다. <톰이라면 나도 오랜만에 방금 봤는데. 그가 운전하는 열차를 타고 막 온 길이거든. 수염을 멋지게 길렀더라고>


그때 갑자기 어디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플랫폼의 저 쪽에서 경찰 두 명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건장한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었다. 둘 다 나보다 키가 훌쩍 컸다. 모여있던 사람들은 뭐라도 씹은 표정으로 갑자기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Sir, Everything is okay?>

두 명의 경찰 중 한 명이 나에게 영어로 물어봤다.

<Yes, I just…>

하지만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경찰은 다른 사람들에게 몸을 돌려서, 독일어로 뭐라고 말을 막 하기 시작했다. 

<Hey Leute, was wollt ihr mit dem hier machen? Verkauft ihr etwas?>

<Nein, wir wollten nur…>

아무래도 경찰은 노숙자들이 외국인 관광객을 성가시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오해를 풀어주고 싶어서 계속 대화에 끼어들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오가는 말들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타이밍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경찰과 노숙자들의 대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노숙자들 중 한 명의 주머니에서 대마라도 나온 모양이었다. 경찰들은 모든 노숙자들의 몸수색을 했다. 곧이어 남자 경찰이 노숙자들을 끌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투덜거렸지만 얌전히 경찰을 따라갔다. 내가 토미에 대해서 더 묻기 위해서 따라 올라가려고 하자 다른 한 명의 경찰이 나를 제지했다.

<Sir, no. you go to your Hotelzimmer.>

<But…>

<Go. now. Around here is not safe at night.>

<But…> 나는 어떻게든 경찰에게 내 상황을 설명해보고 했으나, 갑자기 플랫폼의 반대편에서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쪽을 돌아보니 어떤 남자 한 명이 바닥에 넘어져 있었고, 다른 남자 한 명이 반대편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소매치기인 모양이었다. 

<Scheiße!>

경찰은 아마도 욕임이 분명한 한마디를 내뱉고 그쪽으로 뛰어갔다. 



5

나는 다시 역에 혼자 남았다. 배에서는 연신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녁 열 시가 다 되어간다. 하지만 나는 밖으로 올라가서 무엇인가를 사 먹는 대신에,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열차의 운전석을 보면서 운전수가 수염을 길렀는지를 확인했다. 


고딕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경찰에게 잡혀가기 전에 „방금“ 톰이 운전하는 열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U7은 40 정거장, 북쪽 끝 슈판다우에서 남쪽 끝 루도 우까지는 80분이 걸린다. 내가 지금 이 역 플랫폼 중앙에 서서 양방향으로 들어오는 열차를 모두 보고, 수염이 난 기관사에게 달려가서 당신이 톰이에요? 하고 물어본다면 이론상으로는 80분 만에 지금 운행하고 있는 모든 U7 기관사들을 확인할 수 있다. 혹시라도 착한 기관사를 만난다면 톰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내 계획대로 되어가지 않았다. 우선 역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열차는 양 방향으로 쉴 새 없이 도착해서 사람들을 쏟아내고, 다시 그만큼의 사람들을 태운 다음에 다시 출발했다. 백인, 흑인, 아랍인, 동남아시아인,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전 세계의 사람들이 끊임 없이 타고 내렸다. 플랫폼은 항상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게다가 남자 기관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양 방향의 열차 기관사에게 당신이 톰인지를 질문하기 위해 나는 계속 그 인파를 뚫고 플랫폼의 양쪽 끝을 뛰어다녀야 했다. 


<혹시 당신이 톰인가요?>

<아뇨>

<Are you Tom?>

<Noop>

<Sind Sie Tom?>

<Neee>


기관사는 생각보다 바쁜 직업인 듯했다. 열심히 열차의 맨 앞으로 뛰어가면 겨우 한 마디의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기관사들은 하나같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곤, 자신은 톰이 아니라는 대답을 했다. 그리곤 사람들이 다 타고 내렸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펼쳐진 사이드미러 같은 거울을 다시 닫고는 열차를 출발시켰다.


여덟아홉 번가량 그렇게 플랫폼의 사람들을 헤치고 뛰어다니다 보니 갑자기 현타가 심하게 왔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내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 얄밉게 모른 척하고, 컴퓨터나 인터넷 모뎀이 고장 났을 때나 연락을 하던 K가 뭐가 예쁘다고, K의 고양이가 이 삼일 굶고, 감자나 맛동산이 화장실에 잔뜩 쌓이는 게 뭐가 대수라고, 내가 이렇게 밥도 굶어가면서 생고생을 하고 있는 건지. 


나는 플랫폼 한편에 놓인 자판기에서 물을 하나 뽑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뚜껑을 돌렸다. 푸악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탄산수였다. 바지며 셔츠며 재킷이 물로 흥건해졌다. 솟구치는 짜증을 애써 누르며 나는 캐리어에 있는 수건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캐리어를 마지막으로 본지가 한참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씨발 진짜… 찐따같이 남자친구도 있는 애 다시 만나서 뭐 어쩌겠다고> 어차피 알아듣는 사람도 아무도 없겠다, 나는 나오는 욕을 애써 참지 않았다.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 얼굴이 쏙 나와서 나를 바라보았다. 한국인 커플이었다. 아뿔싸. 나는 화끈해지는 얼굴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6

낯선 사람들이 낯선 냄새가 나는 곳에서 낯선 열차를 타고 내린다.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이제 부쩍 줄어 있었다. 나는 U7 헤어만슈트라세 역의 승강장 벤치에 앉아있다. 벤치의 엉덩이가 닿는 부분에는 검게 도장된 면봉 굵기의 철근들이 격자모양으로 겹쳐서 용접되어 있었다. 한 시간이 넘게 앉아 있었으니 내 엉덩이에는 버거킹의 그릴에 구워진 패티처럼 격자모양이 생겨있을 것이다. 이제는 수염이 난 기관사들을 봐도 뛰어가서 이름이 톰이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열한 시가 넘었지만 K의 전화기는 여전히 꺼져있었다. 나는 내 캐리어를 찾지 못했다. 역무실로 올라가서 직원들과도 이야기해보고, 아까 노숙자들을 데리고 올라갔던 경찰과도 대화해봤지만, 찾을 확률은 무척 낮다고 그랬다. 나는 폴리스 리포트를 작성하고 사인한 뒤에 막 문 닫을 준비를 하던 역 구석의 빵을 파는 가판대에서 푸석푸석해진 크루아상을 하나 샀다. 그리곤 플랫폼에 내려와서 벤치에 앉아서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다 때려치우자. 올라가서 그냥 호텔이나 예약하고, 고양이가 밥을 좀 굶던, 더러운 화장실을 보고 시위하듯 침대 위에 오줌을 싸던 신경 쓰지 말자. 알레한드로니 뭐니, 키는 작고 콧수염을 얍삽하게 기른, 운동보다는 단백질 보충제로 벌크업 하기를 좋아하고 머리는 벌써부터 벗겨지고 있을 것 만 같은 사람과 사귀는 K도 신경 쓰지 말자. 


나는 폰으로 호텔스닷컴에 접속해서 이 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호텔 중에 제일 비싼 호텔을, 그것도 취소가 불가능한 옵션으로 삼박 사일 치를 예매했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룸서비스로 맛있는 음식도 시킬 것이다. 이미 다 조사해왔다. 독일에 가면 꼭 학센이나 슈닛첼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곤 K에게서 연락이 온다고 해도 다 무시하고 혼자서 여유롭게, 전 유럽에서 제일 힙하다는 도시 베를린을 즐길 것이다. 



갑자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쳤다. 

BVG 유니폼을 입고 가방을 들쳐 맨 건장한 남자였다. 수염이 배꼽까지 닿을 만큼 자라 있었다.

<당신 K의 친구?>

<… 톰?>

<나를 찾아다녔다고. 왜 전화를 안 하고?>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천천히 영어로 설명했다. 

톰은 어깨를 으쓱했다.

<독일 통신망이 좀 별로야. 안 터지는 곳도 많고. 대신 내가 사과할게>

그리곤 자신의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엇인가를 꺼내서 나에게 내밀었다.


열쇠고리에 네댓 개가량의 열쇠들이 걸려있었다. 네모난 열쇠, 동그란 열쇠, 길쭉한 열쇠. 

부드러운 털로 감싸진 검은 고양이 인형도 달려있었다.  이 열쇠고리는 내가 K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새끼 고양이를 묻어준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어딘가의 지하철역 안 잡화점에서 우연히 내 눈에 띄었는데 죽은 고양이와 너무 닮아있었다. 하지만 열쇠고리를 받은 K는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묻어준 고양이 생각이 너무 잘 날 것 같다고, 당분간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그랬다.


나는 톰이 건네준 열쇠뭉치를 받아서 고양이 인형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8년의 시간이 그 작은 인형을 닳게 만들었다. 충전재가 빠졌는지 한쪽으로 찌그러졌고 겉에는 드문드문 밝게 변색된 얼룩도 있었다. 


<그 인형이랑 무슨 사연이라도 있어?> 톰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내가 K에게 사준 거야. 8년 전에>

그래서? 톰이 눈빛만으로 다시금 물었다.

그냥 그렇다고. 나도 눈빛만으로 대답했다. 아무런 사연도 없어.


<아무튼, 오늘 고생했겠네. 나 되너랑 맥주 먹으러 갈 건데, 함께 갈래?> 톰이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다시 들춰내며 말했다.

<아냐, 나 K네 집 가서 고양이 밥도 주고 물도 주고 화장실도 치워줘야 해> 짐을 챙겨 일어서며 내가 대답했다.

<괜찮아. 그 고양이 너무 뚱뚱해서 어차피 다이어트 좀 해야 해. 게다가 K랑 알레한드로가 열심히 훈련시켜놔서 오줌은 변기에 올라가서 싼다구. 그러니까 한 시간쯤 늦게 들어간다고 별 일이야 있겠어?>

<안녕!> 

이봐! 하고 외치는 톰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플랫폼을 걸어 계단을 올라갔다. 헤어만슈트라세 역 위에는 그리 넓지 않은 광장이 있었다. 낮에는 장이 열리는 듯, 문을 닫은 채로 이동식 판매대들이 띄엄띄엄 서 있었다. 광장 옆으로 헤드라이트를 밝힌 차와 자전거가 쉴세 없이 오갔다. 


아까 마주쳤었던 구 동독의 군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는 다시 다짜고짜 물었다. <웨얼 아 유 프롬?> 아무래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노쓰 코리아> 나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작가의 이전글 수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