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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부르크의 최중원 Jul 09. 2022

한여름 제주도에서 일기 쓰기

7월 초의 제주도는 후덥지근하다. 민선은 연동을 걸어 다니면서 수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85%의 습도니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실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호텔과 식당, 카페 등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시원하다 못해 춥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타는 버스도 마찬가지다. 등에 난 땀은 금세 금세 마른다. 문명의 이기는 너무 소중하다.


집에 에어컨을 설치한 가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독일에서 살다온 우리는 에어컨을 키는 행위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2020년 함부르크의 8월은 33도를 넘나드는 날이 종종 있었고, 그럴 때면 제일 꼭대기층에 사는 우리 집 온도는 35도까지 치솟았다. 선풍기에서는 뜨거운 바람이 나왔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렀다. 제일 시원한 복도 바닥에 누워서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순간이었다. 누워있는 곳은 우리의 체온으로 곧바로 데워졌다. 우리는 젖은 몸을 서로 부축하며 일으켜 세운 뒤에, 각자 캠핑의자 하나와 책 한 권씩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함부르크의 여름은 매우 건조해서, 나무 그늘 밑에만 있어도 꽤 견딜만했다. 확실히 집보다는 쾌적했다.


그곳의 사람들은 여름에 땀 흘리는 것을 전혀 불쾌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운하에서 카약이며 패들링 보드를 타고 있는 사람들의 티셔츠는 (아마도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오이로파 파사쥐 같은 함부르크에서 제일가는 쇼핑몰이 아니라면, 거의 모든 상업공간들은 에어컨이 없거나 있더라도 냉방성능이 그렇게 세지 않았다. 서울 지하철 2호선처럼 순환선이면서 지상을 달리는 경우가 많은 함부르크의 우반 리니에 3을 우리는 자주 타고 다녔는데, 냉방장치가 가동되고 있었지만 바깥에서 흘린 땀을 시원하게 식혀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람들은 이 더위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우리는 두세 번 정도 여름철에 독일인의 집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모두가 도시의 중심부가 제공할 수 있는 문화적 혜택을 받고 싶어 하는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집은 언제나 집세가 제일 저렴한 꼭대기층이었다. 햇볕을 가리기 위해 암막 블라인드를 쳐야 했기 때문에 집은 어두웠고, 후끈했으며, 사람들은 헐렁한 옷차림으로 맥주를 마셔대고 있었다. 우리랑 똑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선풍기가 없다는 것 정도였다. 쓸모가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우리 집과 작업실에는 각각 한대씩 벽걸이 에어컨이 달려있다. 둘 다 우리가 들어오기 전부터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살 수 있을 만큼은 유러피안의 생활양식(한여름의 낮에는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땀을 흘리며 시원한 맥주로 연명하다가 밤이 오기를 기다린다)대로 살아보기로 했다. 에어컨은 전기를 정말 무지막지하게 먹고, 실내를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대신 실외를 뜨겁게 만들어주는 이기적인 물건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실내온도를 낮춰주는 것보다 더 많은 열 에너지를 밖으로 배출한다는 것이다. 실외기와 실내기를 같은 폐쇄된 공간에 설치한다면 실내기에서 나오는 차가운 바람보다 실외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이 더 세서 그 공간의 온도가 계속해서 올라간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저번 주쯤부터 저항하기를 포기했다. 높은 습도 때문에 널어놓은 빨래에서는 냄새가 났고, 몸을 아주 조금이라도 움직일라 치면 (예를 들자면 빨래를 개는 정도의 단순한 동작에도) 우리의 몸에서는 땀이 났다. 작업실에서는 도저히 집중을 해서 일을 할 수 없었다. 독일에서 살 때와는 달리, 지금 우리는 계속할 일이 있다. 집중이 안된다고 무작정 읽을 책을 꺼내 들고 어딘가 시원한 곳으로 나갈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에어컨을 켜고, 시원한 바람으로 현현된 과학기술이 우리의 몸을 감싼다. 이거야 말로 현대 문명의 승리다! 하지만 동시에, 약간의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에이바우트 카페 신라신성점은 다른 모든 한국의 카페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냉방성능을 뽐낸다. 민선이 친구를 만나러 갔다 오는 것을 기다리며 나는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를 읽고, 에버노트에서 예전에 썼었지만 브런치에 올리지 않았던 글 하나를 찾아서 업로드했다. 두 시간 전부터 나는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깥의 더위에서 시간을 보낼 엄두는 나지 않는다. 이곳의 에어컨은 내가 킨 것도 아니고, 내가 있든 없든 계속 켜져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양심의 가책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비건 식단을 유지하거나, 제로 플라스틱을 실천하거나, 그린피스의 활동가가 되어 불법 조업을 하는 거대한 고깃배를 감시하기 위해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바다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 멋지고, 여러모로 나는 매일매일 그런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디자이너로서 이미 존재하는 것을 대신하는 조금 더 예쁜 것을 만들어내는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띵할 때가 있다. 민선의 연락을 받은 나는 이제 땡볕 아래서 민선을 기다리면서 얼마 전에 녹아 무너진 이탈리아 알프스의 빙하, NFT, 팝업스토어, 언리미티드 에디션, 너무 맛있어서 인스타그램에 안 올릴 수가 없었던 흑돼지 오마카세, 제주시에 새로 문을 연 낮에는 드립 커피를, 밤에는 와인을 파는 카페/바, 외국에서 온 통조림, 병조림 등등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파는 “그로서리 스토어”, 소가 뀌는 방귀 속에 들어있다는 메탄가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어제 선거 유세 중에 갑자기 총을 맞고 죽은 옆 나라의 전 총리… 등을 생각한다. 햇살은 뜨겁고 등에서는 땀이 나기 시작하고, 나는 민선이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민선이 택시에서 내리고 우리는 함께 회전 훠궈 집에 들어가서 청경채, 버섯, 소고기와 양고기 등을 살짝 익힌 다음 땅콩 소스에 찍어먹으며 행복해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우리의 일부로 만든 다음, 이전보다 더 안 좋은 무엇인가로 바꿔 배출한다. 에어컨의 실내기는 식당 안으로 시원한 바람을 불어넣어 주고, 실외기는 식당 밖으로 뜨거운 바람을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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