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용의 해맞이 특별 한정판 아이템
출근길에 3,500 코인을 사용해 하늘색의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 아이템을 구매했다.
푸른 용의 해를 맞이하여 특별히 나온 한정판인데, 다른 보통의 헤어스타일 아이템이 그렇듯 특별한 버프는 없다. 1월 한 달 동안만 진행 가능한, 번거롭고 재미도 없는 퀘스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해야지만 얻을 수 있는 한정판 아이템이다. 한 달 내내 왕복 한 시간 반 가량의 출퇴근 시간 전부를 투자해서 겨우 얻을 수 있었다. 내 캐릭터에 적용시켜놓고 보니 꽤 잘 어울려서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아이템 수집률은 이제 다시 100%를 찍었다. 이 기분으로 오늘 하루를 버티자. 할 수 있다 아자 아자 아자!
서비스를 시작한 지 벌써 5년도 넘은 이 모바일 게임은, 발매될 때는 중세 유럽의 분위기를 살린 유려한 그래픽과 혁신적인 전투방식 등으로 꽤나 기대를 모았었다. 그러나 3년 차에 적용되었던 대규모 업데이트가 영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은 다음, 그 이후 운영진의 대처 과정이 유저들의 반발을 샀고, 그 뒤로 기세가 꺾였다. 이제는 신규 유저의 유입은 거의 없고 고인 물들만 가득한, 언제 갑자기 서비스 종료 공지가 떠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게임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나 역시 고인 물 중 한 명이다. 모든 직업군의 캐릭터를 다 3차 전직까지 완료시켜 봤으며, 모든 서브퀘스트까지 다 깨 보았고, 수집 가능한 아이템을 거의 다 모았다. 여기까지 끝낸 사람들은 다음 업데이트를 기다리면서 게임을 쉬거나, 아니면 게임 내의 커뮤니티 기능을 통해 친구를 만들어 함께 게임 속 세계를 산책하고, 함께 사진을 찍고, 말타기 경주나 활쏘기 시합, 캐릭터 패션쇼 같은 소소한 이벤트를 꾸려 나가며 작은 즐거움을 찾는다.
나? 고독한 한 마리 늑대 같은 나는 게임에서 친구를 만들려 노력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투닥거리는 것은 바깥세상만으로도 족하다. 나는 모든 행동이며 모든 대사가 전부 결정되어 있고, 그 외의 변수는 존재하지 않는 NPC와 노는 것이 더 편하다. 비록 이제 나는 모든 마을의 NPC 하나하나가 말하는 대사를 다 외울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아직까지 내가 이 게임을 하는지를 궁금해 할 수도 있겠다. 이제 그 전설 아이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잠깐, 그전에 아침 회의에 들어가야 한다.
아침 회의
내가 다니는 회사는 그리 크지 않은 광고대행사이다.
벌써 5년째이다. 놀라운 사실이다. 매일 아침 아홉 시 반에 전 직원 열다섯 명이, 모두 함께 앉아 있기에 아슬아슬한 크기의 회의실에 모여서 아침 회의를 한다. 서로가 다르게 생긴 자신의 컵에, 자신의 취향껏 아침 음료를 담아 들고 모여서는 어제 있었던 미팅에서 클라이언트가 어떻게 갑질을 했는지, 오늘 만날 클라이언트가 어떻게 갑질을 할 예정인지 등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나도 물론 이상한 클라이언트를 종종 만나지만, 그들의 이상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새로운 글을 써야 할 지경이기에 우선은 그냥 넘어가 보기로 하자. 나는 열심히 말하는, 또는 자신의 차례에 열심히 말하기 위해 일단은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씩 바라보면서, 그 사람들의 헤어스타일을 관찰했다. 놀랍게도 반삭에서부터 호일펌을 거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까지 이르는 15명 모두의 헤어스타일 전부를 나는 게임에서 아이템의 형태로 소장하고 있다. (물론 색은 전혀 다르지만)
내가 아직까지 가지지 못한 단 하나의 아이템. 그것은 바로 “전설 머리”라고 불리는 헤어스타일 아이템이다. 그 아이템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5년 동안 그 어떤 유저도 가져본 적이 없는, 말 그대로 전설 아이템이다. 그 아이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게임의 시스템 역시 그 아이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아이템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나름의 근거를 몇 가지 제시한다. 대부분의 근거들은 뜬소문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초창기에 터졌던 게임 소스코드 유출 사건 당시, 해당 코드들을 뜯어봤던 사람들이 아직까지 게임 속에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었던 아이템을 발견했다. 이름은 “legendary”, 종류는 “Hair style”, 효과는 “매력도 두 배, 최대치 제한 무시”. 습득 방법은 “특정 조건 만족 시 0.0001%로 필드에서 드롭”.
게임에서 매력도는 약간 계륵 같은 능력치다. 매력이 높으면 상점에서 아이템을 조금 싸게 살 수 있고, 특정 퀘스트에서는 전투 없이 NPC를 설득시킬 수도 있다. 플레이어들끼리의 전투가 벌어져도 캐릭터의 매력이 높다면 상대방이 공격할 때 망설이게 되고, 결과적으로 공격이 엇나갈 확률이 증가한다. 하지만 그 효과가 미미해서, 사람들은 매력도를 올리는 대신 차라리 공격력이나 방어력에 투자해서 힘이나 맷집으로 찍어 누르는 방식을 선택했다. 하지만 만약 매력치에 몰빵한 상태에서 저 전설의 헤어스타일 아이템을 가지게 된다면, 최대치 제한을 무시한다는 옵션 덕분에 이론 상 그 어떤 캐릭터와 싸워도 두 번 중 한 번은 공격이 빗나가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모든 아이템을 반값에 살 수 있다는 것은 덤이다.
한 동안 이 전설 아이템은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였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이 아이템을 얻기 위해 게임 속 세계를 탐험했다. 힘깨나 쓴다는 유명 길드 여섯 개가 연합해서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체계적으로 모든 퀘스트, 모든 NPC, 모든 던전과 모든 집등을 이 잡듯이 수색했다. 하지만 소득은 없었다. 게임 운영사는 해당 아이템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주지 않았는데, 이런 화젯거리가 게임의 매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떡밥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이제는 그전설 헤어스타일 아이템을 진지하게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만 해도 그렇다. 물론 나는 열심히 그 아이템을 찾아서 세계의 방방곡곡을 탐험하고 있지만, 뭐랄까… 어느 정도 핑계에 가깝다고도 생각한다. 매일매일 사람들이 줄어들고 그만큼 버그가 생겨나는 게임 속 필드를 산책하며, 망해가는 세계만이 선사해 줄 수 있는 멜랑꼴리를 느낀다.
나는 세 개의 대륙, 열일곱 개의 마을에 전부 집을 한 채씩 가지고 있고, 다섯 개의 항구 도시마다 대륙을 오갈 수 있는 범선도 가지고 있으며, 이동시간을 대폭 줄여줄 수 있는 비행선도 한 척 가지고 있다. 이런 말을 직접 하긴 좀 뭣하지만, 나는 꽤나 네임드 플레이어다. 하지만 운영사가 서비스 종료를 선언하는 순간, 말 그대로 이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간다. 흔적 하나 없이.
한때는 상상만 해도 괴롭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게임의 쇠락은 너무나 거대한 흐름이어서 일개 유저 한 명이 거기에 대항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지금은 이전보다는 편한 마음이다. 물론 막상 서비스가 종료된다면 꽤나 슬프겠지만.
뭐, 그런 의미로 나는 전설의 헤어스타일 아이템을 찾아다니고 있다. 세계의 대륙 중 두 개를 샅샅이 훑는 데 꼬박 반년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다섯 명의 광고주와 일곱 개의 프로젝트를 끝냈다. 솔직히 기적이라 생각한다. 이 게임이 반년이나 더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이. 그리고 이제 나는 마지막 대륙을 훑고 있다. 서비스 3년 차에 대규모 업데이트와 함께 추가된 이 대륙은 다른 두 대륙보다 크기는 작지만 복잡한 던전이 많아, 나는 이곳을 훑는 데에도 꼬박 반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때까지 운영사가 이 게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솔직히 자신은 없다.
그런데 회의는 대체 언제 끝날까? 일 해야 하는데.
김 부장
나는 최근 김 부장에게 관심이 있다.
내 옆 부서, 그러니까 광고 3팀을 맡고 있는 김 부장은 광고계에서 잔뼈가 굵은, 대략 40대 중반쯤 되는 사람이다. 세월을 거슬러야 한다고, 말하자면 신체적 나이보다 젊게 살고 있음을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어필해야 한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광고계에서 김 부장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광고대행사에 다닌다기보다, 무역회사나 공기업에 다니는 사람처럼 보였다. 몸에는 잘 맞지만 유행이 지난 색과 차분한 패턴으로 된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고 다닌다. 헤어스타일도 언제나 단정했다. 옆머리는 귀가 드러나도록 정리했고, 뒷머리는 언제나 셔츠의 깃과 5cm 거리를 두고 평행선을 달렸다. 앞머리는 무스를 발라 위로 올렸다. 그의 헤어스타일. 언제나 똑같은 길이의 머리였기 때문에 김 부장이 미용실을 얼마나 자주 갈 지에 대해서 회사의 모두가 서로 다른 답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은 가발을 쓰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무도 용기를 내어 김 부장에게 너무나 일관적인 그의 머리카락의 길이와 배치, 분포에 대해서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언젠가 한 번, 나는 회사 근처의 카페에서 김 부장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대학 동기 한 명을 보기로 했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퇴근이 늦어져서 한 시간가량을 어딘가에서 때워야 했다.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고 보니, 입구 쪽 자리에 어떤 남자가 앉아서 폰으로, 바로 그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게임이 제일 인기가 있었을 때에도 자주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그런데 캐릭터의 외형이 심상치 않았다. 모두 합쳐 10세트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천사의 갑옷이었다. 꽤 하는 사람인 걸? 물론 나도 가지고 있지만-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시선을 올려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김 부장이었다.
한창때에는 모두 12개의 서버가 있었지만, 지금 그 게임에는 오직 단 하나의 서버만이 존재한다. 즉 김 부장과 나는 회사뿐만이 아니라 게임 속에서도 함께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천사의 갑옷 세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사람이 꽤나 빡세게 게임을 했다는 뜻이었다. 게임 속에서 내 캐릭터와 여러 번 마주쳤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천사의 갑옷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네임드 플레이어들을 속으로 꼽아보았다. 알려진 소유자는 나를 포함해서 일곱 명. 무도한무도사, 검은팬티, 용용죽겠지, 응봉왕자, 에르힌더그레이트, 불꽃남자, 최악의광고주. 김 부장이 이 중의 한 명일까?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3인 중 한명일 수도 있다.
“최 대리, 퇴근 안 하고 여기서 뭐 해?”
나를 발견한 김 부장이 폰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말을 걸었다. 짧게 사담을 나누면서, 나는 게임에 대해서 말을 꺼내볼까 고민했다. 김 부장이 반가워할까? 민망해할까? 나는 반가운 걸까 아니면 민망한 걸까? 근처에 도착했다는 친구의 연락이 오는 바람에 나는 급하게 김 부장에게 인사를 하고 카페를 떠나야 했다.
그 뒤로 나는 묘하게 김 부장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파티션 너머로 김 부장이 앉아서 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라던지, 부대찌개 집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마주친 김 부장이,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는 부대찌개를 앞두고 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라던지.
김 부장은 왜 아직까지도 이 게임을 하고 있을까?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김 부장은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길드들에 속해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 말인 즉, 김 부장도 나처럼 외로운 늑대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천사의 갑옷 세트까지 가졌을 정도로 정점에 오른 플레이어가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콘텐츠는 많지 않다. 사실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시 그렇다면 김 부장도 전설의 헤어스타일 아이템을 찾고 있는 것일까?
전설의 헤어 스타일 아이템
한동안은 회사 일이 바빴다.
야근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같은 프로젝트에 투입된 직원들이 지금까지 중 최악의 광고주를 만났다고 입을 모았다. 새벽에 택시를 타고 퇴근한 다음 바로 쓰러져 잤다가, 겨우 세수만 하고 일어나 출근하는 일이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커피와 레드불과 디저트와 불닭볶음면을 인벤토리에 든든히 채워두고, 비어갈 때마다 계속 편의점에서 보충해야 겨우 버틸 수 있었다. 전설의 헤어스타일 아이템을 찾는 여정은 잠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김 부장이 이끄는 옆팀도 우리와 비슷하게 바빴다. 함께 야식을 시켜 먹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이번엔 김 부장이, 다음엔 우리 팀의 길 부장이, 번갈아서 야식비를 결제했다. 물론 긁은 것은 자신의 카드가 아닌 법인 카드였지만.
야근하는 내내 김 부장은 자꾸 폰을 들여다보고 무엇인가를 조작했다. 혹시 지금 그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자꾸 폰을 들여다보고 무엇인가를 조작하는 것은 김 부장 외의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부장의 자리는 제일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돌아들어가서 김 부장의 뒤에 서지 않는 이상 나는 김 부장의 폰 화면을 들여다볼 방법이 없었다.
광고 안 최종 피티 하루 전날 저녁 열 시쯤, 발표자료의 문구를 체크하고 있던 나는 게임 운영사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일주일 뒤 서비스를 종료한다는 일방적인 통고 메일이었다. 게임 회사의 사정이 어려워 더 이상은 유지할 수 없다, 최선을 다했다, 그동안 사랑을 주셔서 감사했다 같은 하나마나 한 말들이 붙어있었다. 일어나서 파티션 너머 옆 팀을 보니, 김 부장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광고주는 우리의 제안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회장님이 갑자기 횡령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는 바람에 신제품의 출시 일정이 갑자기 무기한 연기되었다. 우리의 광고 안은 홀드 되었고, 갑자기 우리 팀 전체의 일정이 붕 뜨게 되었다. 팀원들은 모두 일주일간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 말이 재택근무이지, 사실상 일종의 유급휴가 비슷한 것이었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이 운명의 계시 같은 것처럼 여겨졌다. 전설의 아이템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후회 없이 모든 것을 불태울 계획이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넉넉히 소파 앞 테이블에 쌓여있다. 폰의 배터리는 100%. 좋아. 준비 완료. 나는 소파에 몸을 싣고, 엉덩이를 몇 번 들썩여 편하게 자리를 다진 다음 폰을 잡고 게임을 실행시켰다. 기분 탓인지 배경 음악은 평소보다 약간 느리게 재생되는 것 같았고, 화면은 종종 멈칫거렸다. 아무래도 서버를 유지 보수하는 인원이 줄었겠지. 동요하는 마음을 다잡고 차근차근히 마지막 대륙의 첫 번째 던전부터 수색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메시지를 보냈다는 알림이 떴다.
“응봉왕자님. 안녕하세요. 전설의 헤어스타일 아이템을 찾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남은 일주일 동안, 함께 힘을 합쳐서 찾아보는 것을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아침 회의
회장님의 횡령은 아무래도 사실인 듯했다.
재택근무를 하는 일주일 동안 각 언론사들이 경쟁적으로 특종을 내보냈다. 여론은 등을 돌렸고, 야당 여당 할 것 없이 고객사에 날을 세웠다. 아무래도 이 프로젝트는 물 건너간 것 같았다.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할 상황이라, 회사 입장에서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임이 없는 출근길은 뭔가 허전했다. 나는 지하철과 버스에서 뉴스를 보고, 인스타그램을 하고, 트위터를 했다. 모든 게 순간이었고 조각나 있었고 휙휙 지나갔다. 내가 다른 게임에 정착할 수 있을까? 물론 예전에는 메뚜기처럼 이 게임에서 저게임으로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지내던 때가 있었다. 모든 것에 금세 싫증을 내던 때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결국은 지루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것에도 싫증을 느끼게 된 다음부터, 나는 내가 노력하면 싫증이 난 상태에서도 계속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도, 게임도.
전설의 헤어스타일은 이제 사라졌다. 세 개의 대륙과, 열일곱 개의 마을과, 다섯 개의 항구 도시와, 정박해 있는 다섯 척의 범선과 한 척의 비행선, 미스릴 갑옷과 투신의 축복과 천사의 갑옷과, 다섯 중간 보스와, 호시탐탐 세계의 멸망을 노리던 죄악의 군주와 그 부하들도 전부 사라졌다. 나는 멜랑꼴리 이상의 뭔가를 느꼈지만, 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잘 설명하지 못하겠다.
어김없이 아홉 시 반에, 15명의 전 직원들이 좁은 회의실에 모였다. 횡령으로 프로젝트가 날아가는 일은 종종 있었다고, 대표가 감정을 담지 않고 이야기했다. 우리 팀의 작업에 대해 칭찬하고, 앞으로도 이렇게 부탁한다고 말했다. 잠깐 무거웠던 분위기는, 김 부장의 광고 2팀 사람들에 의해 풀어졌다. 역시 광고업계 사람들에게는 광고주 이야기가 만병의 약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나는 자리로 돌아오다가 탕비실 앞에서 김 부장과 다시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단정한 셔츠에, 조금 올드해 보이는 패턴의 재킷과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앞머리는 여전히 무스를 바른 채 위로 올라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뭔가가 달라진 것 같았다. 길이가 길어진 것일까?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김 부장이 말을 걸었다.
“휴가 때는 좀 쉬셨어요?”
“네, 뭐… 거의 누워 있었죠. 김 부장님은요?”
“딸 아이랑 놀아주고, 아내랑 집안일 좀 함께 하고… 그리고 게임도 좀 했죠.”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우리 팀 길 부장이 나를 불렀다.
“이봐 최대리, 얼른 와! 금방 비대면 미팅 시작이야!”
나는 김 부장에게 꾸벅 인사하고 서둘러 소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결국 전설의 헤어스타일 아이템을 찾지 못했다. 모든 던전을 다 뒤졌지만 어디에도 없었고, 모든 NPC가 반복된 대사를 출력할 때까지 계속 말을 걸어봤지만, 아무도 그 아이템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회의실에 앉아서 줌을 켰더니 화면 가득 내 얼굴이 보였다. 길거리를 걷다 보면 만나는 남자들 중 절반이 하고 있는 가르마 펌을 한, 하얗고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남자가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헤어 스타일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