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라이프 12화. 기꺼이 너를 취할 용기
2024년 10월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인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제목처럼 그저 멋진 하루하루로 가득 채웠다. 가을을 온몸으로 맞은 나뭇잎들이 노랑과 초록빛으로 춤춰서일까, 나의 얼굴에도 많은 순간 미소가 듬뿍 지어졌다.
쌀쌀해진 날씨에 '뱅쇼의 계절이 왔다'며 되려 설렜다. 와인과 오렌지, 사과, 레몬, 꿀, 계피, 정향, 팔각 등 재료를 사와 글뤼바인(뱅쇼)을 자주 만들어 마셨다. 다 마시고 남은 과일들로 야무지게 잼도 여러병 만들어 담았다. 직접 끓여 먹는 잼이 내 입맛에 꼭 맞다보니, 이젠 마트에서 파는 잼에 손길이 가지 않는다.
호박을 사와 단호박수프도 아주 맛있게 해먹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들을 손수 요리할 때면 가족과 친구들이 특히 떠오른다. 지금 곁에 가까이 있다면 내가 만든 이 글뤼바인 한잔, 호박죽 한그릇, 잼 한병 건네며 온기를 함께 나눌 텐데. 정작 한국에서는 일에 치여 사느라 한번을 그러지 못했다.
발코니는 나의 작은 천국이다. 빵과 커피를 마시며 가을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은 무척 소중하다. 집앞에 심어진 커다란 나무는 노랗게 물든 잎들을 떨구는 과정조차 아름답고, 햇살과 바람은 금은보화보다 값지게 느껴진다. 독일의 겨울은 혹독하다던데... 새하얗게 눈 쌓인 아침 뜨거운 뱅쇼를 홀짝거릴 생각에 오히려 두근거린다.
드레스덴과 함부르크로 각각 당일치기 여행도 떠났다. 드레스덴은 가면 분명 내가 사랑에 빠지고야 말 지역일 거라고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는데, 역시나 그랬다. 나에게 드레스덴은 그런 곳이 됐다. 넌 감동이었고 환상이었어.
만나기도 전부터 사랑하고, 겪으면 역시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대상들이 있다. 꼭 사람과의 인연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말이다. 세상만사에 보이지 않는 실로 이어진 운명이 있는 걸까.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슈톨렌의 원조가 드레스덴이라기에 기념으로 하나 사왔다.
함부르크에서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저터널(구 엘프터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독일인 남자애가 내게 말을 걸면서, 이후 일정부터는 온종일 그와 함께했다. 독일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오롯이 혼자 지내온 나로서는 예외적인 상황이다.
그 친구를 만나기 전에는 아침 일찍부터 비 내리는 항구에서 청어 샌드위치와 병맥주를 마셨다. 잔뜩 흐리고 거친 날씨였지만 그래서 더욱 낭만적인 부둣가였다. 둘이 교회 꼭대기 전망대, 시청사, 공원, 함부르크 곳곳을 다니다 보니 거짓말처럼 날씨가 맑게 갰다.
이외에도 10월에는 근사한 경험을 참 많이 했다. 베를린필하모니에서의 공연을 비롯해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 전시, 다큐멘터리필름 페스티벌, 빛의 축제 등 황홀경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FC 바이에른 뮌헨 패밀리가 됐다. 공식적으로 멤버십 회원이 된 후로 이들의 역사와 가치 등을 알아가면서 얻는 일상의 활기가 크다.
'굉장히 신나고 든든한 일이 아닌가? 내가 이 팀의 팬을 하겠다는 마음만으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이 하나 생기는 것이다' 바이에른 뮌헨의 어느 팬분이 블로그에 쓴 글이 와닿는다. 약 한달 후 파리 생제르맹과 펼치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 꼭 갈 수 있길 바라고 있다. 그전까지 팀 머플러와 뱃지 등이 담긴 웰컴키트가 배송 와야 할 텐데.
또 가을에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맛볼 수 있다는 '페더바이서'를 운 좋게 두병이나 마셨다. 쿠담 거리에 있는 애플 매장에서 첫 아이패드를 구매하고, 유럽산 질 좋은 겨울 옷과 식기를 아주 값싸게 사기도 했다. 인생을 철학하고 충만하게 사유하는 시간도 많았다.
소설과 시도 썼다. 이곳에 연재 중인 단편소설 '기린목련'은 사실 진작에 3편을 거의 다 써놓은 상태다. 하지만 아무래도 공개하지 않을 것 같다. 내용을 보고 친구들과 가족이 충격을 받을까 염려되기도 하고,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자전적인 이야기로 오해하거나 나의 심리상태를 의심할까 싶은 걱정이 들어서다.
솔직히 이런 걸 다 고려하면 창작을 할 수가 없다. 보기에 좋은 것, 아름다운 것들은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불편함을 뛰어넘어 우울하고 잔혹한 심연을 마주하고, 실컷 아파하고 찡그리고 울고 무너져야만 비로소 다시 빛과 숨을 붙잡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 절친 지우는 '댓글 달기가 힘들어서 안 달았어. 안 읽은 게 아니라 몇번 읽었는데 감히 네가 글을 써내려가면서 의도한 행간이나 감정 같은 것들이 느껴져서... 좀 고민해보고, 조금 더 읽어보고 달게. 굴하지 말고 계속 연재하라'며 나를 독려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그저 행복하고 싶어서다. 홀로 달의 뒷면에 내려앉아 있던 그 시간들 덕분에 어느 정도 해소된 까닭일까.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3편을 그대로 올릴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보류할 예정이다. 지금은 그저 나 자신에게도, 내 사람들에게도 산뜻하고 평온해진 마음만 주고 싶다. 이 계절처럼 말이다.
이 글에서 적어내린 모든 것들- 이조차 남들 눈엔 해외에서 아무 걱정 없이 팔자 좋게 지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독일에 오자마자 주어진 기간과 금액 안에 최대한 빨리 언어를 습득하고 취업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여러 가능성과 상황에 벽을 쌓아 올리게 됐고, 어느 순간 이게 맞나 싶어지면서 혼자 나자빠졌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담과 해내고 싶은 욕심이 결국 지난달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독일을 여행지로서는 제대로 즐겨보지 못하고 곧바로 체류 목적지로만 여겼더니 문득문득 이런저런 생각들이 고개를 내밀 때마다 휘청거렸다. 어려워도 즐거움과 매력을 느끼던 독일어가 '진짜 뭐 같은 언어'라고 미워질 정도였으니.
그리고 팔자 좋으면 좀 어때? 나는 늘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로만 살아야 하나. 평생 주어진 상황에서 이 악물고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나. 나도 마음 편히 누리고 즐기면 좀 어때. 매사 진지하고 의미부여하지 않아도 그냥 내 영혼이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고이면 고이는 대로, 춤추면 춤추는 대로 살아보면 좀 어떠냔 말이야.
생각에 그치지 말고 용기를 내기로 했다. 이 또한 나 자신을 알아가고 마주하고 창조하는 과정이다. 내일 저녁 예매한 베를린필 공연은 또 얼마나 근사할까. 10월의 마지막 날인 할로윈데이는 독일에서 어떤 모습일까. 불안 대신 기꺼이 설렘을 품으며 한달간의 기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