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올 Jun 29. 2024

쓸모의 무쓸모와 능력 이상의 쓸모에 대하여

내게 주어진 달란트를 직무유기함을 반성함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었다. 일기예보에서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요즘 우리나라 일기예보의 정확성은 놀랄 만큼 정확하다. 물론 오늘처럼 가끔 빗나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분까지 정확히 맞춘다. 아홉 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수줍은 새색시처럼 내리더니 이제는 혈기 왕성한 청년 같은 기세로 내린다. 뒷벽과 축대사이의 공간을 비바람이 드나들며 거친 소리를 낸다. 지붕 위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거세다. 처마밑에 제비가 늦게 네 개의 알을 낳아 품고 있는데 비가 많이 와서인지 엄마, 아빠 제비가 분주히 드나든다. 제비들도 나름 꾀가 있다.  탄탄한 받침 위에 만든 둥지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지푸라기를 모아서 대충 지었다. 그렇게 지어도 안심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보통의 제비는 진흙을 구슬처럼  만들어서 둥지를 만든다)



내가 사는 집은 퍼플섬으로 불리는 보라섬에 있다. 마을의 집들에는 대부분 대문이 없다. 우리 집은 대문뿐 아니라 현관문도 없다. 거실이라 부르는 가장 큰방에도 문이 없다. 마루문을 열어놓으면 밖에서 안까지 훤히 보인다. 작년에 지관의 업을 가지신 분이 지나가시면서 바다의 대운이 집으로 들어오는 집이니 항상 마루문을 열어놓으라고 하셨다.  평상시에도 잘 열어놓았던 문을 그 뒤로는 더 열심히 열어 놓는다. 근처에 외출할 때도 십 센티 정도 열어 놓는다.




내가 거실로 사용하는 공간은 전 주인은 큰방으로 사용한 것 같다. 작년 여름에 이사를 오면서 방문을 떼어냈다. 뭉실뭉실 구름 혹은 꽃잎처럼 보이는 무늬가 있는 반투명의 유리에 문살이 있는 두 짝짜리 미닫이 문이었다. 문틀이 내려앉은 것인지 문이 뒤틀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빈티지 느낌이 물씬 나는 문을 떼어낸 이유는 잘 열고 닫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레트로스러운 문이라 떼어 내기가 아쉬웠다.


문의 역할이 무엇인가?

문을 열면 두 공간이 이어진다. 문을 닫으면 두 공간으로 분리된다. 바람이 통하게도 해주고 바람을 막아주기도 한다. 열면 춥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다. 닫으면 덮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다. 문은 참 아이러니 한 역할을 한다. 전혀 반대의 역할을 천연덕스럽게 해내고 있다. 이런 역할을 잘하기 위해서는 잘 열리고 닫혀야 한다. 밀고 당기는 혹은 열고 닫는 제 역할을 잘 해낼 때 문의 정체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 역할을 잘하지 못했다. 삐걱거리며 내 힘을 빼앗았다. 문의 창살무늬와 반투명의 유리가 마음에 쏙 들었지만 미모가 구실을 이기지는 못했다. 문짝을 겨우 떼어냈다. 문살에 터주대감처럼 앉아있던 묵은 먼지들도 함께 버림받았다. 문짝이 떼어진 자리에 인디언핑크색의 암막커튼을 걸었다. 지난겨울 커튼을 치고 겨울을 났다. 벽에서 7~8cm 떨어져 걸린 커튼은 겨울바람을 다 막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벌어진 커튼 틈으로 (틈이라기 하기겐 간격이 솔직히 간격이 넓다) 들락날락하는 차가운 공기가 나의 갱년기 열을 적당히 식혀주었다. 폐쇄공포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꼭꼭 닫힌 공간이 답답하다.


문짝, 커튼, 바람도 자기의 역할이 있다. 인공적이지 않은 것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역할을 하고.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들은 때때로 기능 이상의 역할을 해내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지 못하기도 하다.


'나는 어떠한가? 나의 쓸모에 맞게 역할을 잘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종종 쓸모의 무쓸모스러운 삶을 살기도 하고 주어진 능력 이상의 역할을 해내도 한다. 능력이상의 쓸모는 반길만 한 일이다. 하지만 그 반대일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늘이 내려준 능력을 방치하고 사는 것은 죄가 아닐까? 직무유기(職務遺棄).'

종종 주위의 사람들이 안타까운 마음과 질책의 마음을 담아 내게 말을 한다.

"아휴 참, 그 능력을 가지고 왜 이렇게 살고 있어?"

때로는 과대평가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내가 모르는 나의 능력들. 사장된 달란트.


문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는 문틀에서 떼어져버려 진다. 나 역시도 내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문짝처럼 도태될 것이다.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한 섬생활에 너무 젖어 사는 걸까?

다른 사람들이 평가해 주는 나의 능력을 방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남들은 노력해도 얻기 힘든 선천적인 재주를 유기하는 것을 반성하지만 반성만큼 실행력이 따라주지 못한다. 앱을 다루는 능력, 새로운 것을 배울 빠른 습득력, 배움과 체험에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과 호기심.


소나기 같은 재주를 흙탕물로 만들어 그대로 흘려보낸 시간들. 이제는 조금씩 가두어 웅덩이를 만들고 저수지로 키워야 한다. 비가 그치고 흙탕물이 가라앉아 깨끗한 물이 되어 작은 물고기들이 노니는 저수지.

넓은 호수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그것은 나중의 일이니까. 정신 차리고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쓰자. 강의 안을 만들고 꾸준하게 영상을 올리자. 사람을 모아 나의 재능이 경제활동을 하게 하자. 같이 일을 해보자 하는 사람들의 손을 모른 척하지 말자 그 손이 언제까지 나에게 향하란 법은 없다. 돈이 많은 부자보다 시간이 많은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 소중한 시간을 얼마나 헛되이 보냈던가. 창 밖의 거센 비바람소리가 내게 말하는 듯 듯하다.

"정신 똑바로 차려. 완벽보다는 완결에 집중하라고!"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려본다. 챌린지 포스팅. 책 두 권의 책리뷰, 소설 쓰기. 임박한 공모전에 보낼 디카시 써서 보내기...... 할 일이 많다. 힘내라. 얼른 남편의 저녁 밥상부터 차려야겠다. 하지감자와 애호박에 청양고추를 넣고 된장찌개를 끓여내야겠다. 내일도 비가 온다는데 내일은 김치부침개를 부쳐서 이슬 톡톡 한잔 곁들여야겠다. 열린 마루문 밖으로 작은 배가  흔들흔들 왈츠를 추듯 부드럽게 흔들린다






작가의 이전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