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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 너구리 Sep 16. 2020

돈 술 노래

돈 술 노래


                                           박태건


결혼 전, 노래를 불러주면 돈은 자기가 벌겠다며 천사의 미소를 짓던 아내가 아침에 출근한 옷차림으로 소파에 누워 있다 늦은 밤, 고등학생 딸을 데리러 가야 한다는 아내의 목소리가 갈라졌으므로 나는 읽던 시집을 덮는다 돈과 싸우려먼 돈이 필요하다 돈과 싸우지 않으려 해도 돈은 필요하다


술을 마시고 싶은데 불러낼 사람이 없다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은 바쁘거나 바쁘지 않아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 요즘은 일없이 만나지 않는다 휴대폰에 "아프다"고 말하니 "많이 아플 땐 귀찮더라도 병원에 가는 게 좋아요" 라고 AI가 대답한다 그렇다고 대꾸하고 싶진 않다


잊고 지냈던 노래를 부른다 지금은 소식 없는 동무들과 부르던 노래는 별똥이 되어 어디로 사라졌을까? 내 안에 타오르던 불꽃은, 딸 책상의 LED 스탠드에도 파리한 내 손바닥의 깊어진 주름에도 아직 빛을 발하고 있으므로


정말 그랬다. 나는 결혼 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노래만 불러줘도 좋았다. 그가 한 여름의 베짱이처럼 노래를 불러 준다면 나는 개미처럼 열심히 일해도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럴 자신도 있었다. 그래서 시인과 결혼했다. 시인은 우리 삶을 노래로 채워주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지금도 나는 이 생각에 변함이 없다. 우리 신랑이 속삭이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나는 좋아하고 그와 함께 하는 이 삶이 행복하다.


하지만 이 생각이 매일매일 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시시 때때로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들기도 하고, 그 생각에 몸과 마음이 묶여버리기도 하나 보다. 난 가끔 억울하기도 하다. 작가들은 작가 지원 프로젝트라고 해서 어떤 일정한 공간을 제공해 주고 그 공간에서 글을 맘 놓고 쓸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신랑도 그걸 신청해서 집이라는 일상적인 공간을 벗어나서 그곳에서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작가들과 이야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난 3개월 정도 그렇게 집을 떠났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오기도 하고 그러면서 집필을 했다.


나는 고2와 고3인 아이들의 엄마다. 둘 다 기숙사에 있다. 그래서 주중엔 좀 자유롭다. 엄마 댁에 자주 갈 수 있는 것도 아마 이 덕분이리라. 그러나 아무리 아무것도 안 해 준다고 해도 금요일 저녁이면 귀가해서 일요일에 귀사 하는 아이들을 아예 모른 척할 수는 없다. 늦은 시간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오는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하는 일이 나에겐 쉽지 않았다. 초저녁 잠이 많은 게 나를 더욱 힘들게 했으리라. 그래서 신랑의 전화를 받는 나의 목소리도 퉁명스러운 날이 많다. 자다가 일어나서 애들 데리러 가야 했기 때문에 거실 소파에서 그냥 쪽잠을 자고 있었으니까 졸리운 사람을 건드리면 성격이 나온다는 말도 있으니까


신랑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술 해독하는 능력이 떨어져서 술만 마시면 온 몸이 벌겋게 변한다. 어디 아픈 사람 같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부쩍 혼자 술을 잘 마신다. 나는 대학 때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속을 다 버렸다. 그래서 위를 망쳤기 때문에 술만 마시면 배가 아프다. 사실 술은 맛으로 마신다기 보단 분위기로 마시는 것 같다. 마음이 아프면 소주를 마시고, 친구와 반가울 땐 맥주를 마시고, 흥이 넘쳐나는 시아버지랑은 공주 밤막걸리가 최고다. 그렇지만 혼술은 좀 서글프다. 함께 해 주지 못하는 내 마음도 서글프다.


나는 그가 노래를 잊지 않고 지내길 바란다. 소식 없는 동무들과 연락을 해서 만나고 그 친구들과 함께 잊힌 옛 노래라도 좋으니 함께 부르길 바란다. 그의 노래가 시가 되고, 그의 노래가 내 지친 몸과 마음에 활력소가 되길 바란다. 그래서 난 행복한 볘짱이 옆에서 그의 악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의 불꽃이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으므로, 불꽃이여 타 올라라. 나의 시인이여, 내 사랑이여



커버이미지: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 박태건 시인. 모악 출판사. 2020.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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