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간 너구리 Sep 12. 2023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이장

2. 화 낼 줄 모르는 여자

이 글에 등장하는 장소와 인물은 허구이며, 실제가 아닙니다.


"삑비비빅 삑삐 삐빅"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며 이보름 씨는 생각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비밀번호를 둘째 주민번호로 놔 둘 것인가? 처음 이 빌라로 이사를 올 때 둘째가 오학년이었다. 둘째가 자기 주민번호를 외워야 한다고 생각한 이보름 씨는 현관 비밀번호를 둘째의 주민번호로 설정했다. 이제 그 둘째가 대학생이 되어버린 지금도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으니 도대체 몇 년 째 이 비밀번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게으르기가 이를 데가 없다. 남들은 네 자리로 간단하게 비밀번호를 설정하는데 굳이 여덟자리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는 것은 이집에 살고 있는 그 누구도 이 비밀번호를 바꿀만큼 부지런하지 않거나 혹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지독히도 게으르기 때문이리라. 게으르다고 생각하니 화가 갑자기 치솟았다.

이보름 씨는 요즘 자기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물이 가득찬 물컵과 같다고, 그래서 물이 넘치기 직전이라고, 물이 항상 가득차 있기 때문에 살짝 건드리면 물이 넘쳐흐른다. 이보름 씨에게 여기서 물은 화다. 이보름 씨의 삶엔 화가 가득차 있다. 그래서 누가 조금 건드리기만 해도 화가 넘친다. 조금 살짝 말을 얹기만 해도 화가 폭발한다. 화를 다스릴 수가 없는 지경이랄까?

이보름 씨는 그런 자기 자신을 갱년기라 칭한다. 이보름 씨의 화는 선택적이다. 물론 이보름 씨는 회사에서는 화를 억누른다. 회사에서까지 화를 낼 수는 없다. 다 벌어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화를 내는 순간 벌어먹을 일이 아득해지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이보름 씨의 눈이 식탁을 향한다. 역시나 식탁은 가관이다. 먹다 남은 치킨 조각들이 식탁 위에 널브러져 있다. 너댓 개 남은 치킨 무에서는 파리가 막 알을 까고 일어선 듯 내가 다가가도 움직이지 않다가 날개를 파르르 떨더니 무거운 날개짓을 옮겨 바로 옆 치킨으로 옮겨 앉는다.

'알을 깐 걸까? 아니면 먹은 것을 뱉은 걸까? 파리는 먼저 지가 먹은 것을 뱉고 나서 다시 새로운 것을 먹는다든데, 저것은 치킨을 먼저 먹은 걸까? 치킨 무를 먼저 먹은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손을 바들바들 떨며 이보름 씨는 남은 치킨 조각을 입에 문다. '치킨 무도 먹어야 제 맛이지~'

치킨을 뜯어 먹으며 이보름 씨는 개수대를 쳐다 보았다. 아침부터 먹고 쌓아놓은 그릇들이 쌓여 있다. 이 시점에서 이보름 씨는 숨을 한 번 더 들이켠다. 화가 스멀스멀 가슴 속에서 태동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화를 내기 전에 이보름 씨는 먼저 숟가락과 젓가락 개수를 센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짝을 맞추어 세 본다. 숟가락 한 개, 젓가락 두 개다. 그렇다면 두 명 다 점심까지 먹었다. 저녁은 치킨을 먹었을 것이고, 숟가락 한 개와 젓가락 한 개는 아들 꺼,  젓가락 한 개는 딸 꺼다. 느지감치 아마도 2시에서 3시 사이 쯤 둘이 일어나서 한 끼 식사를 했을 것이고, 저녁은 배달음식이다.

"야 이 새끼들아~ 밥을 먹었으면 설거지라도 해 놔야 할 거 아냐? 내가 니들 종이냐? 노예여? 회사에서 죽으라고 일하고 와서 니네 밥 처먹은 설거지까지 내가 해야 돼? 당장 설거지 안 해?"

상상 속으로 욕을 날린다. 화를 폭발한다. 그러나 현실의 언어는 이거다.

"오늘은 점심을 먹었네? 설거지도 해야지, 엄마 많이 피곤해. 치킨도 치워야지. 이렇게 그냥 놓으면 벌레 생겨"


매거진의 이전글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이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