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의 여인숙> 제4화
미국 드라마 <바이킹스>는 8세기 말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족이 처음으로 서쪽에로의 바다 탐험길에 나서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들이 폭풍우 치는 바다를 뚫고 간난신고 끝에 발견한 육지는 섬나라 잉글랜드. 잔혹한 정복자인 그들은 그곳 수도원의 성물(聖物)을 약탈하고 무방비의 수도사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것인데, 바이킹족의 우두머리가 교회 한 구석에 쪼그리고 숨어 있는 한 어린 수도사를 발견한 것은 그 아수라 지옥의 와중이었다. 당장 작살을 내야 했겠지만 공포에 질린 수도사가 가슴에 무언가를 꼭 껴안고 있는 꼴이 칼을 높이 쳐든 학살자의 억센 팔을 잠시 멈추게 했다. 그게 뭐냐? 책입니다. 책? 황금도 보석도 아닌, 종이로 된 그게 뭐라고 그렇게 꼭 안고 있단 말이냐? 대강 이런 대화가 오간 끝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어린 수도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가 있었다.
“말씀이 없다면 우리에겐 어둠밖엔 없습니다.”
우두머리는 그를 살려주고 자기 나라로 데리고 가는 것이지만 그 후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더 보지 않아 나는 모른다. 영화는 폭력과 정념과 권력 투쟁을 뒤섞은 역사 오락물로 마냥 흘러가는 속에서 야만적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의 빤한 승리로 귀결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말씀이 없다면 우리에겐 어둠밖에 없습니다……!’ 이 한 마디로 족했다.
그것이 없다면 어둠밖에 없다는 그 말씀이란 무엇일까? 요한복음 1장 1절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다.’
그럼 하나님은 누구일까? 어디에 계시는가? 13세기 아프가니스탄의 현자이자 시인인 잘랄루딘 루미의 가르침은 이렇다.
‘하나님은 혈관보다 가까이 계신 데 어찌 생각의 그물을 멀리까지 던져야 한단 말인가?(……)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든 그것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생각으로 붙잡을 수 없는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그래서, 어쩌란 걸까?
모르겠다. 다만 방향 없이 솟아나는 생각대로 프랑스 애니메이션 <왕자와 공주> 연작 중 한 에피소드 얘기를 해 보면 어떨까 싶다. 철벽처럼 굳게 닫힌 문이 문득, 기적처럼 열리는 신비의 순간을 보여주는 이야기여서다.
어느 왕국에 마녀라 불리는 여인의 성이 있었다. 왕은 공고문을 써 붙였다. 마녀의 성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를 제압하는 왕자에게 자신의 공주를 주겠노라고. 제방의 왕자들이 몰려가 온갖 무기로 성을 공격했지만 난공불락, 성문을 열지도 마녀를 어쩌지도 못했는데, 이를 줄곧 지켜보기만 하던 한 소년 왕자가 있었다. 그는 불화살이나 대포 같은 무기는커녕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마저 땅에 내 던지고는 빈손으로 성을 향해 경쾌하고 씩씩하게 걸어간다. 마침내 성문 앞에 서게 된 왕자, 몇 번 노크를 하고는 정중하게 묻는다. “들어가도 될까요?” 성문은 활짝 열렸고 모습을 드러낸 마녀 아닌 마녀는 말한다. “어서 오세요. 이처럼 공손하게 문을 두드린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군요.”
하나님 왕국의 문은 이렇게 열리기도 하지 않을까?
성서에 기록된 것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들어가도 될까요?’라는 왕자의 공손한 말도, ‘어서 오세요.’라는 마녀 아닌 마녀의 친절한 말도 빛과도 같은 또 하나의 ‘말씀’이란 걸 눈치챌 수 있지 않을까? 왕자의 말씀, 마녀의 말씀을 듣지도 상상할 수도 없었기에 그 숱한 힘센 왕자들은 어둠 속에서, 가장 가까운 데 계시는 하나님을 못 알아보고 그토록 하나님의 성을 공격했던 게 아니었을까?
말씀이 없다면 우리에겐 어둠밖엔 없습니다.
말씀은 빛처럼 늘 우리 곁에서 함께 하는 것인데, 우리는 왜 이토록 자주 우리가 어둠 속에 있다고 느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