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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Dec 17. 2021

나의 전교조 해직 전말기

며칠 전에 “교실 안의 야크”라는 영화를 봤다. ‘선생님은 미래를 어루만지는 직업’이라는 영화 속 히말라야 오지마을 촌장 말씀에 뜨끔했다. 나는 그런 사명감도 자부심도 없이 교사 노릇을 시작했고 끝마쳤는데, 부끄럽고 미안하고 쓸쓸하고…. 복잡한 마음이 되었다. 


 1983년 3월 부산에 있는 사립 동인고등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했다. 과목은 일반사회, 6년 남짓 교사 노릇을 하다 1989년 8월에 해임되었다. 동인고등학교는 동래 향교, 유림이 주축이 되어 세운 학교로, 여느 사립학교와는 달리 재단의 간섭 없이 교장을 중심으로 교사들이 자율로 꾸려가는 학교라는 자부심이 구성원들에게 있었다. 그런 중에 관리자의 전횡과 관련한 일로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는 일이 몇 번 있었고, 회의 준비를 위해 뜻맞는 교사들이 모이곤 했는데, 그 자리를 기반으로 평교사회가 만들어지고 전교조 분회로 발전했던 것 같다. 우리 학교 분회는 부산에서 규모가 큰 축에 들었다.  


나는 어떻게 해직까지 갔나. 대학 다닐 때는 ‘운동권’ 가까이 가본 적이 없다. 1979년 ‘부마항쟁’ 때는 제대를 앞둔 전투 경찰 고참으로 데모대를 막아섰다. 의협심이 전혀 없지는 않아 후배 전경들이 데모대를 폭력으로 대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기도 했지만 말이 안 먹혀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씨알의 소리”,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을 읽고 현실에 눈뜨는 경험은 있었다. 교사 초임 시절 “민중교육”지 사건을 알고는 ‘이 뭔 말도 안 되는 짓거리가 다 있노’, 비분강개하기도 했지만 ‘마음 장군 합바지 똥 싸는 격’이었다.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교육민주화 선언”이 있다는 소식이 두어 다리를 건너 내게도 들렸다. 동참해야 한다는 당위와 피하고 싶다는 실존적 고민 상황, 그 소식을 물고온 선배와 나는 참가 대신에 금정산 동문에 올라 술을 마셨다. 그리고 비틀비틀, 하산하면서 큰 바위를 붙들고 얼마나 울었던지. 그 뒤로 그 바위를 어쩌다 지날 때면 내 비겁함이 떠올라 괴로웠다. 


망미동 성당의 로사 회관 모임이 기억난다. 그 모임이 계기가 되어 각 교과별 모임이 조직되었고 그 모임을 모태로 ‘부산교사협의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으로 나아갔으니 ‘로사 회관 모임’은 부산 교육운동뿐 아니라 내 삶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나는 몇 권의 책과 유인물을 통해 전교협의 전교조로의 전환에 대해 읽고 토론했지만 깊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교육운동’과 ‘교사운동’의 차이와 공통점 같은 주제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직까지 갔을까. 나이가 한 역할을 했을까. 그때 나는 서른 초반의 초보 교사였는데, 워낙 부산 교육운동의 기반이 약하니 참여자 안에서는 제법 나이가 든 축에 들었고 그러다 보니 나잇값한다고 출범 준비 모임의 ‘총무부장’을 맡아 투쟁기금 마련을 위해 쟁반을 만들어 팔았다.

 

그때 부산은 조직세가 약해서 발기인 대회를 경남과 함께 할까 고민할 정도였다. 3억 정도로 기억되는 전국 투쟁기금 목표액에서 부산은 아주 미미한 배당을 받았는데, 그것도 채울 수 있을까 걱정을 했다. 그런데 뜻밖의 높은 호응에 고무되어 부산교대 강당에서 발기인 대회, 부산대학교에서 창립대회를 해냈던 기억이 있다.


나이를 해직의 이유로 들었는데, ‘총무부장’이라는 직책도 한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노동운동, 노동조합의 역사적 의미나 책무를 생각해서 해직을 결심한 것은 아니고, 쟁반을 떠넘기고 돈을 모은 것에 대한 작은 책임감이 있어서 꼬리를 내릴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남에게 손 벌려놓고 그 손 거두어들이기가 쪽팔려서. 


7월 9일 여의도 집회로 경찰서 붙들렸다 나오니 큰 아이가 6주 진단 교통사고로 입원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앞앞이 캄캄, 그 다음은? 아이 돌보는 일은 아내에게 맡기고 전교조 사수 싸움, 싸움 제대로 했으면 좋으련만 술 마시고 노가리 푸는 데 아까운 힘 허투루 쓴 적 많았던 것 같다. 아내가 교사로 맞벌이였다는 것도 해직 결심의 큰 이유가 되었을 거다. 혼자 벌었다면 입에 풀칠, 목구멍이 포도청 운운하면서 탈퇴각서 썼을지 모른다. 해직 동지 가운데 혼자 벌어 사는 사람을 높게 생각했다. 박순보 지부장 형님! 형님의 구체적인 삶은 모르지만 아이들은 한창 크는데 얼마나 돈이 기러웠겠노. 담배 한 보루, 용돈 한번 손에 쥐어드리지 못한 것 반성한다. 


나는 해직 기간 4년 반을 오롯이 전교조 운동에 전념하지 못했다. 해직 2년 정도 되니 불안이 엄습했다. ‘이러다 영원히 놈팽이 되는 거 아이가?’ 그만큼 운동과 사람살이 공부가 모자랐다는 얘기일 테지만 아버지가 평생 룸펜으로 지내는 것을 본 사람으로서 그것은 매우 뚜렷한 실체성을 갖는 것이었다. 꽃장사 2년 정도 했다. 영업을 위해 교제를 넓히면서 학교와는 확실히 다른 체험을 했다.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 훌륭한 인품자들을 많이 만났다. 희생과 헌신의 착한 영혼들, 두려움 없이 싸우는 용감한 투사들. ‘내 사랑 한반도여 전교조로 물결쳐라’, ‘전교조와 함께라면 죽음마저 감미롭다’ 같은 구호를 따라 하기도 버거웠던 나로서는 전교조가 아니었으면 못 만날 사람들이었다. 


글을 쓰게 된 것도 전교조 덕이다 싶다. 이상석 형을 따라 글쓰기회에 나가 조금씩 배우고 쓴 게 오늘의 내 일기장이고 몇 편의 시고 산문인 것을 감사한다. 


1994년 3월 부산 금정여고에 복직하여 2016년 2월 경남 통영에 있는 충무고등학교에서 ‘명예퇴직’을 할 때까지 22년을 학교에 더 있었다. ‘미래를 어루만지는 직업’인 교사으로서의 책임감, 자부심이 많이 모자랐지만, 이만큼이라도 교직 생활을 해내게 한 나의 등대였고, 파수병이었던 전교조에 감사한다.  


* 이 글을 쓴 노영민 선생은 지금 경남 함양에서 농사도 짓고 시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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