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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Dec 20. 2021

학교에 별 문제가 없었다면
해직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1979학번으로 부산대 사대 체육교육학과에 들어갔고 86년에 장림여중에 첫 발령을 받았다. 신설학교였는데 과원이 되어 옮긴 남중학교에 2년째 근무하던 때인 1989년 전교조가 결성되었고 그해 여름 나는 해직이 되었다. 


그전에 물론 부산교협에서도 활동했다. 그전인 1987년엔가 부산 YMCA중등교육자 협의회 선생님들이 무슨 선언을 했다고 징계받았다는 소식을 누구에게 선가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래서 나는 Y-교사회에 이름을 올렸었다. 그 후론 민주교육 추진 부산교사협의회가 출범할 때부터 함께 했다. 학교 마치면 교협 사무실로 달려가곤 했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학교의 아는 선생님들을 찾아가 교협 활동 소식을 전하고 교협에 참여해 달라는 조직 활동을 했다. 1987년 6월 항쟁 때는 부지런히 거리 시위에 도 나갔다. 그랬으니 교협이 교원노조로 전환되고 전교조가 결성될 때 함께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왜 교육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는가. 여기에 대한 내 답은 한마디로 이렇다. 학교에 문제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가장 큰 문제는 각종 금전 비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교장도 일부 교사도 서무과장도 비양심적이었다. 체육과 수업을 위한 운동 기구들을 너무 비싸게 들이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교장과 서무과장에게 직접 따지고, 직원회의 때 공개적으로 질문도 하며 항의했지만 쉽게 시정이 되지 않았다. 그런 교장, 서무과장과 한통속이 되어 거기서 떡고물이라도 챙기려는 교사도 있었다. 운동장 공사 관련해서도 그랬다. 


두 번째 문제는 학교마다 운동부란 것을 만들어놓고는 엘리트 교육하는데 돈과 시간을 너무 많이 들이는 것이었다. 학교 체육 교육은 아마추어리즘으로 가야 하고 모든 학생을 위한 것이 되어야 마땅한데 그게 아니었다. 체육 특기생 중심으로 돌아가는 엘리트 체육 교육이 학생들을 위한 체육 교육 자체를 망치고 가로막고 있었다. 이것도 쉽게 시정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세 번째는 교장이 중심이 된 학교 운영에 부조리한 게 너무 많았다. 학생 대상 검열이 얼마나 많았던지. 예를 들면 수학교사 출신인 교감이 체육교과의 과정을 검열한다고 했다. 우습고 어이가 없었다. 완전히 형식적인, 가짜 실적 위주의 행정이었다. 그런 게 많았다.    

  

형식적인 것이라 해도 탈퇴 각서, 그런 거 쓰기 싫었다. 정부의 강요가 싫었다. 그랬을 뿐이다. 그것 때문에 부모 형제와의 갈등은 없었다. 나는 미혼이었고, 좀 자유로웠다. 


해직 기간 4년 8개월 동안 다른 일은 않고 상근자로만 활동했는데 생활은 물론 어려웠다. 그렇지만 부모님 집에서 살았고 그 덕을 봤다. 부모님은 한 번도 내게 걱정이 된다거나 이래라저래라 하시지 않으셨다. 나를 전적으로 지지해 주신 셈이다. 1992년 해직 상태에서 현직에 있는 전교조 활동가 여선생님과 결혼했다. 


출근 투쟁할 때가 생각난다. 학교에 가니까 학부모들이 못 들어간다고 하길래 비키시라고 하고는 학교에 들어갔다. 저만치에서 그 광경을 보고 서 있는 교장이 보였다. 그러나 아직 어린 중학생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몰랐고 별다른 움직임도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학교에서는 형사도 출동하고, 동료 교사들까지 교문을 지키고 서 있었고, 몇몇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해직교사를 지키기 위한 농성도 했다. 


1989년 그 여름에 부산지부 사무실은 못 들어간 형사들이 내가 없는 집으로 찾아가 우리 부모님을 만났는데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당신들이 할 일은 도둑놈 잡는 것이다. 그 일을 해야지 왜 선생인 우리 아들을 찾아다니고 그러느냐.”  

    

1994년 3월 사하여중으로 복직했을 때의 일이다. 내가 담임인 반 부반장 어머니가 식사나 하자고 해서 밥 먹는 자리에 갔더니 선물이라며 포장된 무엇을 건네주었다. 보니까 운동복이었다. 내가 체육 교사니까 이런 선물을 하나 보다 하고 그걸 받아 집으로 갔다. 그런데 집에 가서 풀어보니 운동복 안에 돈봉투가 들어있었다. 


이 돈을 어떻게 할지 아내와 의논한 결과, 스승의 날에 학부모회에서 준 것으로 해서 모든 교사에게 선물을 하면 되겠다 싶었다. 내가 직접 국제시장에 가서 머그잔 60개를 샀다. 그걸 다 포장을 해서 스승의 날 전날, 학교 교무실 선생님들 책상 위에 하나하나 올려 두었다. 그랬더니 얼마 안 있어 학부모회를 담당하는 여선생님이 나를 긴히 불렀다. 학부모 회장이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자기들은 그런 선물을 한 적이 없는데 어찌 된 일이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내가 사연을 말해 주자 그걸 알게 된 여선생님은 도대체 어느 선생님이 그랬는지를 묻는 학부모에게 내 이름을 알려 주면서 말했다고 한다. “


그 선생님은 당연히 그렇게 하실 분이다.” 

그 여선생님이 나를 두고 ‘당연히 그렇게 하실 선생님’이라고 말한 것은 전교조 교사에 대한 그 선생님의 인식과 평가가 어땠는가를 잘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런 전교조, 그런 전교조 교사들이 나는 지금도 자랑스럽다. 

      

1989년 여름, 해직 대열에 동참하느냐 않느냐, 갈림길에 섰을 때 나는 주저 않고 해직 대열에 섰다. 따질 이유가 없었다. 누가 나보고 왜 그랬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이렇다. 


‘학교에 비리와 부조리가 없었다면 내가 해직될 이유도 없었다.’   


* 이 글을 쓴 김성태 선생은 나이 예순이 다 되었지만 지금도 한 번씩 전교조 사무실에 들른다. 고향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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