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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Dec 18. 2021

1989년과 현재를 연결하기

1988년 부산의 외곽지역인 낙동 여자중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교사로 임용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발령이 나서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했다. 대학 시절 집회와 시위에 자주 참여한 관계로 발령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발령 직전까지 나는 생활 야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야학은 연산동에 있는 성당에서 하다가 나중에는 당감동으로 옮겨서 계속했던 것 같다. 당시에 활발하게 전개되던 교사 운동을 보고 야학은 그만두고. 1988년 2학기부터 ‘부산교사협의회’ 활동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시절 나는 ‘배움 공동체’라는 동아리(서클)를 통하여 ‘페다고지’, ‘민중교육’, ‘교육과 문화적 식민주의’ 등을 접하면서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러나 이런 신념보다는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몸소 체험했던 학교의 온갖 문제들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군 복무를 막 마친 20대 중반의 초임 교사가 교육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는 어쩌면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우리 사회의 비극일 수도 있다. 지금의 젊은이에게도 과거의 고통을 넘겨주고 싶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나 시대의 아픔과 고통이 있고, 동시에 새로운 희망도 있을 것이다.


교사가 된 지 1년 6개월 만에 전교조는 결성되었다. 1980년대 중후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가 수없이 많았으므로, 전교조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은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나는 우리 학교 분회의 분회장이 되었는데, 그 이유로 1989년 7월 말경 열린 첫 번째 징계위원회에서 파면 처분을 받았다. 8월 하순에는 출근 투쟁 중에 경찰에 연행되고 구속이 되어 1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2심에서는 선고유예를 받았다. 대략 2달 넘게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구치소에서 깨달은 게 있다면 구치소도 사회의 일부이고, 죄를 지은 사람의 잘못이 40%라고 하면, 60% 정도는 사회의 구조적인 요인도 있다는 걸 몸소 느꼈다. 최근에 법률가 출신(변호사, 판사, 검사)들이 국회에 많이 있다 보니, 그들은 법이나 제도를 만들면 사회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주장하는데 사회구조적인 요인들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이들이 만든 법으로 현재 학교에는 안전교육, 생명존중 교육, 아동학대 예방교육, 청렴교육, 성인지 감수성 교육, 차별금지 교육 등 법적으로 반드시 이수할 연수만 잔뜩 늘어났다. 그러나, 그 실효성은 의문이다.      


겨우, 1년 반의 경력을 가진 교사가 해직되었다는 것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너무 짧은 교직 생활을 한 탓에 가장 아쉬운 것은 초임 교사로서 학생들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만드는 경험도 없었고, 수학교사로서 수학을 가르치는 기쁨도 느껴보지 못한 채 해직되었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직은 가족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지금도 그것은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 


해직 기간을 돌아보면 20, 30대 젊은 시절,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볼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오로지 전교조 활동에만 매여 있었던 것도 아쉽다. 한 개인의 삶에서 정치적 활동과 더불어 경제적 활동, 문화적 활동, 여가 활동이 총체적으로 어울린 삶을 살아야 하는데, 오로지 전교조 활동에만 매달린 결과, 이후 삶에서 다른 분야에서 필요한 삶의 기술이 너무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과 살아가는 기술, 서로의 잘못에 대하여 어떻게 용서하는지, 화해하는지 등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도 없이, 근거도 없는 자만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온 것은 반성해야 한다. 

    

1994년 복직 이후 나의 행적에 관심을 가지는 동료를 위하여 간단히 소개한다. 학교 교사로 복무하는 것 외에 1994년에서 1997년까지 방송통신대학에서 전산과 관련된 공부를 했고,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수학교육과 관련된 공부를 하여 박사학위를 얻었다. 이런 이유로 대외적인 전교조 활동을 소홀했지만, 단위학교에서 맡은 역할(분회장 등)은 충실히 수행했다. 2009년부터 ‘부산수학나침반연구회’와 ‘전국수학교사모임’, 수학과 1정 자격연수 강사 등의 활동을 했다. 2015년에 수석교사가 되어서 수업에 대한 깊은 숙고와 새로운 실천을 모색하게 되었고, 교사 양성과 교사 재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전교조는 1990년대보다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것은 다른 시민단체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전교조가 예전만큼 지지를 받지 못해도, 전교조 운동은 87년 6월 항쟁과 7월의 노동자 투쟁을 이어온 교육 민주화 운동으로 그 역사적 의의가 상당하며, 그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평가를 받는 것이 이후 민주화 운동에도 분명히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해직 교사들의 복직 이후 삶이 모두 같지 않음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는 방법이 다르고,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되었을 것이다. 성철, 명진 스님 같은 분도 70살이 넘어서도 끊임없이 동안거, 하안거를 통하여 수행한다. 해직 교사들도 새로운 삶을 위한 실천과 이론을 끊임없이 모색할 때, 1989년의 발자취가 더욱 빛날 것이다. 그렇지만 해직 교사 모두가 성인(聖人)은 아니므로 최소한 교직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성찰하는 삶을 바랄 뿐이다. 


나도 명예퇴직을 하는 순간까지는 성찰하는 삶을 살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올해(2021) 수학교육에 관한 책 1권(질문과 유추로 탐구하는 수학 수업 나침반(경문사))을 썼으며 교육에 관한 책 2∽3권을 더 쓸 계획이다. 이후에는 은거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살 예정이다.    


* 이 글을 쓴 이는 박철호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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