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겨울방학 때 2정 정교사 연수를 받으러 충남대학교에 갔다. 그때 같이 교육을 받던 한 친구가 부산 YMCA에 가면 교사들 모임이 있다는 얘길 듣고 연수를 마치자마자 YMCA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난 교사들이 바로 부산 Y-교사들이었다. 내가 고민하던 교육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토론과 발제를 통해 서로 의견을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았다. 혼자 고민하던 당시의 교육 현안들에 관해 같은 공감대를 가진 선생님들과 자리를 같이하는 것만이라도 내 답답하던 속이 다 풀렸다. 학교에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촌지를 받지 않는 것뿐인데 그건 너무 미약하게 느껴졌었다.
1984년 경부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통치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도 서서히 끓어올랐고, 그건 교육계도 마찬가지였다. 1986년 한국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 교사들의 5.10 교육민주화 선언은 전국적으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면서 교육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런 속에서 부산에서도 9월 6일을 기해 ‘영남지역 민족민주교육 실천대회’를 감행했다. 그 대회를 준비하는 동안 다들 긴장했다. 5.10 때와는 달리 이번엔 교육 당국은 강경하게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되었기 때문에 다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회를 진행했다.
그다음 날로 당장 교육청 장학사들이 각 학교로 파견되어 참석 교사들에게 일일이 조사와 문답서를 받고 징계를 시작했다. 영남지역이 제일 큰 피해를 입었다. 경남의 권재명 선생님, 울산의 노옥희, 정익화 선생님이 해임되고 부산에서는 영남지역 Y 교사회 회장 김관규 선생님과 부산 Y 교사회 회장인 내가 해임되었다. 그리고 이광호, 윤지형, 김영준, 서선근 선생님도 직위해제에 감봉 징계를 받았으며 아직 어린 여선생님인 채석인, 이은희 선생님은 경남 하동과 남해로 강제 부당전출이 됐다.
당시 9월 출산 예정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내에게 직위해제라는 출산 선물을 들고 가 아내의 출산을 기다렸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결혼할 때 장인 어르신은 교직은 절대로 쫓겨날 일이 없는 안정된 직장이라며 우리의 결혼을 승낙하셨었다. 그런데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게 되었으니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해직이 되고는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장사를 시작했다. 안경점에서 고객에게 서비스로 주는 안경 수건(안경점 용어로는 후끼라고 했음)을 안경점에 납품하는 장사였다. 영남권 총판을 하게 되어 지도까지 그려가며 부산 경남을 누볐다.
해직 동안 해직된 학교인 거성중학교로 들어갈라치면 동료 선생님들은 나를 슬금슬금 피했다. 그것이 참 슬펐다. 교육운동 기금 마련을 위해 양호규 선생님 같은 작가의 판화 작품을 팔러 갈 때면 아예 말도 못 꺼내게 했다. 그래도 학교 관리자 몰래 판화를 사 주겠다는 선생님이 있긴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복직을 하면 교사들을 단결시키는 일에 앞장서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교사들이 단결하면 그 힘이 얼마나 큰지를 바로 교사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1987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서 복직 문제가 거론되고 교육청과의 줄다리가 시작돼도 난관이 많았다. 복직이 정부의 방침인데도 복직 대상인 딸을 두고 교육청 장학사로 있는 아버지가 나서서 딸을 모욕하며 복직을 방해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그런 관료들이야말로 우리 복직의 걸림돌이었다.
나는 1988년 6월에 복직했다. 학기 중이라 2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재단 사무실에서 오전 근무만 하게 되었다. 달리 하는 일은 없어서 책만 읽다가 퇴근을 하곤 했는데, 이렇게 주어진 시간에 무언가 뜻있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생각한 게 재단 산하의 학교들에 평교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퇴근하면 재단 산하 7개 중등학교 (광성공고, 대동고, 대동중, 남성여고, 남성여중, 거성중, 계성여상)를 차례로 방문, 그 학교의 핵심 선생님들을 만났다. 그리고 내가 안면이 있는 선생님들이 재직하는 다른 사립학교들(동인고, 경혜여고, 부산진여고, 동명공고, 동래여고, 덕원공고, 혜광고, 브니엘고, 부산외고, 학산여고, 양정고, 덕문여고, 이사벨여고, 경희여상)도 방문, 평교사회 결성 문제를 놓고 의견을 나누었다. 6월 항쟁의 영향으로 교사들은 평교사회에 상당한 호의를 보였다.
사립학교는 공립과 달리 재단을 등에 업은 교장의 권위가 막강해서 교사들의 목소리가 잘 나올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막상 평교사회가 결성되니 거꾸로 교장들이 알아서 교사들 눈치를 보게 되었다. 당시 사립학교에선 미혼 여교사가 결혼을 하면 사직서를 내는 게 당연시되었었다. 평교사회가 만들어지고 나니 그런 부조리도 점차 사라졌다.
그런데 교사협의회가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조직을 노동조합으로 전환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상황은 긴박하게 흘러갔다. 우리 재단 산하 학교에서도 평교사회가 전교조 분회로 전환되었는데 정부의 강경 방침이 발표되면서 전교조 조합원에 대한 징계가 가시화되었다.
나는 우리 학교 분회장에 부산지부의 조직부장이었기 때문에 탈퇴 각서를 거부하고 복직 1년 만에 다시 해임됐다. 내가 맡은 임무 때문에 해임은 당연하다 여겼지만 식구들에게는 면목이 없었다. 그럼에도 어머님은 아들을 믿어주셨고 아내는 남편의 입장을 이해해 주었다. 그런 어머님과 아내를 나는 지금도 여전히 존경한다.
해직 기간에는 끼니가 없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어머님과 아내는 직접 경제 전선에 나서서 머리에 팔 물건을 이고 장사도 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해도 다 물리치고 당신의 아들, 당신의 남편이 시대의 불의함에 맞서 싸우며 당당하게 사는 것을 내심 자랑스러워했다. 다른 해직 교사들 중에는 집도 없고 벌이도 없는 사람도 있다면서 그것에 비하면 우리는 그래도 우리는 부자라고 하시던 어머님의 목소리는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그 얼굴도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