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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Dec 17. 2021

1989년, 나는 예뻤고 나는 빛났다

 

 1981년 부산사대 역사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엔 1년 반가량 미발령 상태였는데 그 시기 나는 부산 신발공장에 노동자로 들어갔다. 대학 다닐 때 역사과 학생으로 민중의 역사, 민중의 힘에 관해 공부도 하고 생각도 했는데 정작 민중의 실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게 없다는 생각에서 노동현장을 직접 경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 


신발공장에서 학교를 자퇴한 18, 19세 어린 노동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의 현실은 비참했다. 야근 등 노동시간도 길었고 그에 비해 월급은 굉장히 적었다. 그래도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 아이들과 사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시간도 가졌는데, 그들은 그만둔 중·고등학교의 교사들을 떠올리며 마구 욕을 했다. 그들에게 학교는 차별과 폭력, 인권 유린이 일상화된 곳이었다. 

    

공장에 들어갈 때는 중졸로 속이고 들어갔다. 사상에 있는 공장이었다. 같이 들어간 내 친구는 본드 냄새를 못 견디고 하루 만에 그만두었고 나는 두 달 동안 미싱을 밟는 일을 했다. 그러고 나니까 조직에서 큰 공장으로 옮기라 했다. 감전동에 있는 신발 공장의 주식회사 아식스 라인에서 1년 반쯤 일했다. 그랬더니 조직의 지도자가 “너는 딱 노동자다. 계속 노동운동을 해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공장이 좀 무서웠다. 노동자들을 각성시키는 글이 적힌 홍보물을 새벽, 공장에 출근하기 전에 거리에도 뿌리고 출근해서는 공장 화장실에도 뿌렸는데 그게 너무 부담스럽고 무서웠다. 하루는 출근하는 차량에 홍보지를 뿌렸다. 어떤 아저씨가 나를 잡으러 뛰어 왔는데 잡히지는 않았다. 도망치면서 이번만 안 잡히면 공장 생활은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987년 나는 부산사대 미발령 교사 모임 회장을 맡아 교육청을 상대로 발령 투쟁을 벌였다. 그 회장 자격으로 부산 교협 준비위원회 발족식이 있던 망미성당 로사 회관에 갔었다. 그러고는 첫 발령을 받았다. 발령 투쟁의 성과로 그해 발령자 숫자가 확 늘어난 것인데 그래서 좀 승리하는 기분으로 첫 교단에 섰다. 


학교는 갑갑했지만 교사가 된 게 기뻤다. 그리고 꼬리표 같은 게 붙어서 발령을 받았기 때문에 내게는 여교사가 커피를 타는 등의 일에서도 빠졌다. 교장 교감이 수업을 감시한다거나, 학생들에게서 받은 사진값의 일부를 교사들이 회식비로 쓴다거나, 50대의 여교사가 앞장서서 젊은 교사를 감시하고 교장 교감을 접대하는 그런 일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선배 교사에게 아이들에게 받은 사진값의 일부를 왜 사진사로부터 되돌려 받는지를 물은 적이 있다. 그 대답이, ‘그 돈 안 받으면 사진사 사장만 좋은 일 된다. 니가 받기가 싫으면 그걸 학생들에게 쓰면 된다.’였다. 내가 부산 교협에 처음부터 참여한 것은 이런 것들을 함께 없애나 가야 했기 때문이다. 선배 교사들 중에서는 나보고 교협 활동이나 집회 같은 데 나가지 말라고 한 교사도 있었는데, 나는 선배님들이 안 해서 제가 지금 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역사교사 모임에 나가거나 우리 반 학생들을 부산대로 데리고 가 거기서 대동놀이 등 문화 활동을 하거나 하는 일은 신도 나고 재미가 있었다. 교장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낮에는 학교에서 학생들과 재미있게 보내고 밤에는 교협 사무실로 가서 역사교사모임에 참석하거나 교협 지역 모임을 했다. 정말 좋았다. 전교협이 전교조로 전환키로 했을 때는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받아들였다.       

전교조의 출범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당시는 ‘전 씨 3형제’라고, 전노협, 전대협 그리고 전교조가 있었는데 세 형제 중에서도 전교조가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했다. 노동 중에서도 교육 노동이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에 전교조가 중요했던 것이다. 

나는 4녀 1남 중에서 셋째였는데 나를 비롯해 순천 사는 언니와 형부, 남동생 이렇게 넷이 다 교사였고 교협 활동을 했는데 전교조가 결성되자 우리 아버지는 걱정이 되었다. 우리 넷이 다 잘릴까 봐 걱정이 되셨던 것이다. 하루는 선박 관련 일을 하시고 다소 한량이셨던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희주 니만 해직되면 안 되겠나” 하셨다. 나는 즉시 예, 대답했다. 왜냐하면 우리 넷은 이미 나만 해직 대열에 서는 걸로 의견 일치를 본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동평여중에서 해직되었다. 당시 우리 부서 부장이 우리 집을 찾아와 어머니에게 나의 탈퇴각서를 권유했는데 어머니는 여태 당신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우리 딸이 전교조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우리 학교에 같이 근무한 김진수 선생은 탈퇴 각서를 썼다가 다시 탈퇴 무효화 선언을 하고 해직되었다. 해직 기간 지부 상근자로만 활동했는데 그 생활은 순탄했다. 재미도 있었다. 내가 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지부의 조직 관련 일이었다. 공립 조직부에서 일했다.    

  

해직 후 부산에서는 공사립 합쳐서 65명이 해직 무효 소송을 했다. 조직의 방침이기도 했는데, 결론적으로 10명이 승소했다. 나도 승소자 중의 하나였다. 나중에 판결문을 보니 소위 핵심 분자인 내가 승소한 것은 1989년 7월 9일 서울서 열린 ‘‘전교조 탄압 저지 및 합법성 쟁취를 위한 제1차 범국민대회’(‘7.9 대회’) 때 연락책을 임무를 맡은 관계로 정작 대회에는 참석을 못해 그날 경찰에 안 잡혀갔기 때문이었다. 어떤 해직 교사는 그 대회에 갔다는 사실이 텔레비전 뉴스에서 나오는 바람에 패소했다. 우습게도 7.9 대회 참석 여부가 우리의 승소 패소를 가르는 기준에 된 것이다. 우리가 승소하자 교육청은 항소했는데 곧 항소를 취하했다. 그래서 우리는 전교조 해직교사 일차 복직이 이루어진 1994년 3월보다 한 달 후인 4월에 복직했다. 승소해 복직한 10명은 받게 된 월급의 일부를 부산지부에 후원금으로 냈고 그것을 지부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기금으로 썼다. 

     

1989년은 내겐 예뻤다. 빛났다. 그 역사의 한가운데 나는 있었다. 피와 눈물의 역사였고 눈물보다 빛나는 역사, 내 청춘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전교조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복직해서도 해직교사 경험의 덕을 많이 봤다. 지금 이렇게 잘 살아가는 것도 다 그 덕이라고 생각한다. 


* 이 글의 주인공인 이희주 선생은 지금은 명예 퇴임하여 자유인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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