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생인 손정옥이 미술 교사로 처음 교단에 선 것은 1980년, 부산의 낙동 여중에서였다. 사상공단이 가까운 곳이었다. 공단 내 신발공장엔 전라도 등지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돈 벌러 온 어린 노동자들이 숱했고 학교에 다니다가도 공장에 가야 한다며 자퇴를 하는 아이들도 적잖았다. 그게 너무 안타까워 한번은 한 아이의 부모에게 학비는 내가 댈 테니 얘를 고등학교는 보내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부모는 '당신이 우리 집 생계 책임질 거냐'라고 항변을 했다. 그곳에서 그는 2년 반 동안 야학을 했다. 노동야학. 어린 노동자들에게 무언가 희망을 주고 싶어서였다. 학교 부근 마을 '이장님'이 '선생님이 좋은 일 하시는데' 하며 마을 회관을 교실로 빌려도 주고 이런저런 도움도 주었다.
그런데 때는 서슬 푸른 전두환 신군부 정권 초기. 1981년 부산지역 사상 최대 규모의 조작된 공안사건으로서 부림 사건이 터졌다. 그는 야학 때문에 몇 번이나 서부경찰서로 호출을 당했지만 구치소에 갇힌 부림 사건 관련자들을 위한 영치금 모금에 팔을 걷고 나섰다. 다행히도 별 탈 없이 지나갔고 1984년엔 무사히 진여자상업고등학교로 전근을 갔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85년 공안당국은 교육무크지 〈민중교육〉의 내용을 문제 삼아 대대적인 공안몰이를 했고 이번에는 권력의 칼날은 그릴을 비껴가지 않았다. 그해 가을 어느 날 교장실로 호출을 당했는데, 가보니 수사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불온서적, 불온사상, 불온 교사 운운하면서 그를 대공 분실로 끌고 갔다. 그래도 그는 가난 때문에 기를 못 펴온 여상 학생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주고 싶어서 그들에게 도서관이나 서점을 알려주며 책 읽기를 권장했고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자존감을 키워주고 싶어서 ‘너희의 권리는 너희들이 찾아야 한다’고, 너희들 옆에는 내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진여상 부임 1년 반 만에 그는 학교에서 쫓겨난다.
해직 후 그의 발길은 더욱 빨라졌다. 1987년 6월 항쟁의 역사가 저만치서 오고 있는 중에 그는 경성대 부근 뒷골목 한 지인의 건물 지하에서 떡볶이 장사도 하고 그 공간을 나눠 복사점도 열고서는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유인물을 비밀리에 찍어내기도 했다. 신이 나서 그랬다고 했다.
전두환을 몰아낸 항쟁의 한 결실로 부산진고로 복직(1988년)을 한 다음에는 도서원 운동에 뛰어들었다. 사람들에게 책도 빌려주고 공부도 하고 모임도 하는 어떤 아지트를 만들었다. 그가 서면에 문을 연 ‘아롬 도서원’은 교사 소모임 운동의 산실이었다. 대체로 독서 모임이었다. 일선 학교 소모임 대표 교사들의 회합도 거기서 이루어졌다. 평교사회 건설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1989년 전교조 사태 땐 그는 내심 또 해직되고 싶지는 않았다. 복직한 지 겨우 1년 반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한 부친이 한 마디는 그의 폐부를 찔렀다.
"(전교조가) 이번에 또 쓰러지면 우리나라 교육은 망한다."
그는 두 번째 해직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1994년 부산공고로 복직하고 정년 퇴임을 할 때까지 그에겐 교사로서의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 교장이 부러 배제하지 않는 한 반드시 담임을 맡는다.
둘째, 수업에 절대 충실한다.
셋째 아침 일찍 교문 앞에 서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며 그들과 대화한다.
정말이지 가는 학교마다, 일 년을 하루같이 그렇게 했다. 굳이 말하자면 그에게 그것은 전교조 참교육 실천의 일환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타고나기로 한 번 결심하면 좀처럼 중간에서 쉽게 그만두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다.
그러는 중에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그는 해운대 지역에 사는 전교조 교사, 사회 운동가, 보통 시민들과 함께 '4. 16 해운대 촛불'을 결의하고는 곧장 해운대 장산역 부근의 NC백화점 앞 거리에서 촛불 집회를 가지기 시작한다. 이 또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랬다. 처음 200일은 매일 했고, 그다음 2년은 월, 수, 금으로 이어갔는데 더 세월이 흘러서야 주 1회로 줄였다. 세월호 참사로부터 4년 8개월, 1702일째가 되었을 때에야 ‘손정옥들’은 '해운대 촛불'을 접기 위한 마지막 촛불을 들었었다. 두 번의 해직과 복직이 그랬듯이 ‘세월호 촛불’도 앞만 보고 달린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