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보 선생은 1943년 12월 15일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밀양 박 씨, 3남 3녀 중 장남. 4.19 혁명의 해인 1960년 부산 동래고에 입학해 시위에도 참여했다.
1963년 부산대 사범대 물리교육학과 입학. 1970년 3월 언양 상북중학교에서 첫 교단에 섰으며 1973년에는 부산 서면중으로 옮긴다.
1988년 부산 양정동에 위치한 부산 교사협의회 사무실을 직접 찾은 이래로 오랫동안의 평범했던 교직 생활을 마감하고 교사·교육운동에 뛰어든다. 그해 11월 서면중 평교사협의회 창립에 앞장선 것을 시작으로 1989년 6월 10일 전교조 부산지부가 결성되었을 때는 부지부장이 되었다. 7월 15일 자로 해임. 교육과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선생의 헌신적 행보는 해직 이후 더욱 빨라졌고 또 넓어졌다.
1991년 강경대 열사 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노태우 폭력 정권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의 잇단 분신 사태 때는 민주주의 민족통일 부산연합 상임의장을 맡아 청년, 시민들과 함께 노태우 정권에 맞섰고, 14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이듬해는 김영삼의 3당 야합으로 탄생한 민자당에 맞서 연제구의 범민주 단일후보로 출마, 김영삼의 오른팔인 격인 최형우 후보와 격돌해 33%라는 놀라운 득표를 하기도 했다.
선생은 1994년 3월 전교조 해직교사 1차 복직 때는 복직 신청을 하지 않고 바깥에 남았다. 아직 합법화의 길이 먼 전교조에서 부산지부장도 맡아야 했고 전국 부위원장뿐 아니라 여타 사회·노동단체에서 그가 수행해야만 하는 역할은 산더미처럼 많았던 것이다. 1999년 전교조 합법화와 함께 김대중 정부의 해직교사 2차 복직 때 그도 학교로 돌아간다.
그러나 학교는 그에게 너무 좁은 공간이 되고 만 걸까. 곧 사표를 내고는 당시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만들어진 민주노동당의 부산시지부장, 중앙위원을 맡는 등 사회 민주화, 정치 민주화 운동의 영역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하고자 분투했다. 전교조든 노동단체든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참된 기독인들은 신에게 ‘저를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필요한 도구로 써 달라’고 기도한다고 한다. 선생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는 개인의 안일 같은 것은 곁눈도 주지 않고 교육과 사회 민주화를 위한 도구, 거름으로 살았다 할 것이다.
선생은 2011년 6월 담도암 판정을 받고 그해 8월 11일 향년 68세의 일기로 아깝게 운명했다. 장례는 '참스승 박순보 선생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고 많은 노동, 교육 열사들이 묻힌 경남 양산 솥발산 공원 묘원에 안장되었다.
다음은 당시 부산지부 조합원인 내가 한겨레 신문에 보낸 추모의 글 ‘참교육 한길 걸었던 청년 교사’이다.
순보 형님, 순보 선생님.
결국 이렇게 가시고 마는군요. 예순여덟 성상 만년 청년으로 살아온 당신이 저 피안으로 가시고 만 오늘 아침 창밖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가슴을 때립니다. 아픕니다. 슬픕니다. 눈물이 솟아오릅니다. 지난 6월 담도암으로 넉 달, 아니 두 달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우리는 믿지 않았습니다. 자연요법을 위해 경주 산내로 들어가시기 전날만 해도 서른 명 넘게 손두부집에 모인 동지들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더랬습니다. “병마와 싸워 이겨 다시 돌아오겠소!” 그리고 우리의 강권에 못 이겨 노래도 한 곡조 뽑았더랬지요.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전교조라 부르리~~.”
당신의 ‘18번’이었습니다. 다들 빌고 또 빌었습니다. ‘전교조 연정’이 저토록 뜨겁게 살아 있는데…, 머잖아 건강 되찾아 우리 곁으로 돌아오리라고. 아, 우리들의 든든하고 인정스러운 형님이자 오빠이자 동지이자 벗이며 기댈 언덕이었던 당신은 그리 쉽게 가시면 안 된다고.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난 것은 민주화 대항쟁의 해인 1987년 가을 어느 날로 기억합니다. 부산 교사협의회 지하 사무실로 45살의 당신은 문득 나타났습니다. 침묵과 굴종의 오랜 세월, 서면중 과학교사 박순보는 반드시 터져 나올 교사·교육운동의 때를 기다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날로부터 당신에게는 오직 한길만이 펼쳐졌습니다. 참교육, 민족민주, 노동, 사람 사는 세상 운동의 그 길은 가시밭길, 때론 천 길 낭떠러지 길이었지만 당신이 언젠가 한 말처럼 그것은 당신 자신의 표현처럼 ‘갈수록 맛깔나는 길’이요, ‘가슴 벅차게 행복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녕 당신은 가신 것입니까? 이 캄캄한 야만의 시대, 노동 형제들의 피눈물 마를 날이 없고, 비인간적인 학습노동과 경쟁에 내몰린 어린 학생들의 신음소리 더 높아만 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 함께 가야 할 길 멀기만 한데 ‘민주 도깨비’, ‘부산 갈매기’ 박순보, 우리 시대 참스승 당신은 이렇게 가신단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마음을 압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이렇게 듣습니다.
“나를 참교육운동, 민주 민족운동, 민중운동의 도구로 써주시어 고맙소. 행여라도 이 박순보에게 남은 것은 가난과 병마와 쓸쓸함밖에 없다고 말하지 말아 주오. 자식들에게 못다 한 사랑이 가슴에 걸리지만 동지들이, 벗들이 있어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꿀 수 있었고, 그 꿈을 위해 분투할 수 있었고, 그래서 나는 행복했소. 그대들을 사랑하오.”
그렇습니다. 순보 형님, 순보 선생님, 우리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부디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