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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Dec 18. 2021

학교를 바꾸고 싶은 열정이
내겐 있었다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다녔다. 고교 시절 내 꿈은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남자’가 교사가 되는 것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시절이라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그 꿈을 포기할 뻔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사범대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6년 3월 나는 큰 기쁨과 설렘을 안고 첫 교단에 서게 되었다. 학생들과의 관계는 무척 좋았다. 대학 시절의 자유분방한 생각으로 학생을 대했기에 어쩌면 학생들에게 나는 선생님이라기보다는 형, 오빠 아니면 친구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학생들을 통제하고 지시하기보다는 그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려고 했으며 학교 측의 지나친 규제에 대해서는 함께 분노하기도 했다. 


발령 첫해 선배 교사들한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잘하려고 하지 마라. 그저 중간만 해라.’, ‘새로운 걸 하려고 하지 마라. 그냥 시키는 것만 해라.’였다. 직원회의 시간에는 일방적 지시 전달만 있었고, 혹시라도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면 난리가 났다. 교육운동에 적극 동참하게 된 것은 당시 학교가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갉아먹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학교의 이런 분위기는 마치 ‘중력’과도 같아서 여기에 맞서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 추락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력’에 맞설 수 있는 힘은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할 때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사협의회와 같은 교사 단체의 등장을 매우 반겼고 적극적으로 함께 했다. 교협 교사들의 모임에서는 교육에 대한 열정을 지닌 선배 교사들을 많이 만나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열정은 나에게 힘을 주고 어떤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선사했다. 


정말이지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나의 자식, 후손들에게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이런 엉터리 사회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또한 학교를 바꾸고 싶었다. 내가 만나는 이 아이들에게 경쟁을 강요하고, 지시와 통제를 강요하는 교육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전교조 운동에 처음 참여하면서는 머지않은 장래에 해직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교사들이 단체를 만들어 활동한다는 이유만으로 해직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합원 명단 공개 이후 정부의 해직 협박이 드세어지면서는 정말로 해직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굴복하고 싶진 않았다. 세상을 바꾸려면 누군가는 이 정도의 희생을 감수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나도 그 대열에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해직은 첫 학교인 공항중학교에서 겪었다. 결혼 9개월 차, 1989년 9월 27일이었다. 아직 아이는 없었다. 해직 1년쯤 후에 아이를 낳았고, 아내와 함께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갔다.  

    

해직 기간 중 좀 슬펐던 장면이 하나 있다. 해직교사에겐 진료비를 좀 덜 받는다는  치과 의원을 소개받아 충치 치료를 했는데 마지막 치료를 하루 남긴 날 그간 치료비를 보는 순간 숨이 확 막혔다. 당시 해직교사들이 지부로부터 받던 한 달 활동비의 몇 배가 되는 금액이었다. 그걸 미리 알았다면 아마 치료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치료를 받았고 다음 치료 방문 때 그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너무나 막막했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힘겹게 한숨을 쉬며 저간의 일을 털어놓았는데 “여보, 너무 걱정 마. 내가 어떻게든 그 돈 마련해 볼 게.”라는 아내의 말에 나는 펑펑 울었다.  


 가슴 벅차게 감동적인 순간도 물론 있었다. 

상경해서 벌이곤 했던 ‘해단투’(해직교사단결투쟁) 때마다 우리는 경찰에 연행되곤 했는데, 모두들 도망가기는커녕 동지들이 잡혀가면 ‘나도 잡아가라’ 하며 모든 해직교사들이 연행을 자처했었다. 그리고 경찰서 안에서 보여줬던 동지들(!)의 모습은 정말 존경스럽고 감동적이었다. 경찰에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꾸짖으며 우리의 정당성을 외쳤었다. 그리고 모두가 묵비권을 행사하였기에 지도부가 단 한 명도 노출되지 않았고, 결국 이틀 후에는 결국 전원 풀려나곤 했다.   

   

나는 해직 기간 문화 활동을 주로 했다. 집회 때 연극 공연을 하고, 농성 때도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으로 농성 대오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보통 때는 현장 교사들을 대상으로 놀이나 연극 연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러한 활동에서 나는 내가 가진 역량이 적극적으로 발휘되는 느낌을 받았고 많은 기쁨을 느꼈다.  

   

해직 당시 가졌던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정’이 지금 내게는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좀처럼 바뀌지 않는 세상의 모습에 실망하고 지친 것일까? 현재의 나 자신의 모습에도 많이 실망했다. 현재 나의 모습은 내가 존경하고 롤모델로 삼았던 선배 교사들의 모습과 너무도 거리가 멀다. 난 학교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교사의 모습이 아니라 그냥 그저 그런 마음 좋은 선생님일 뿐이다. 이에 한동안 굉장히 실망하고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정도도 괜찮아.’라고 나에게 말한다. 정년을 4년 채 남기지 않은 지금, 그래도 학생을 사랑하고 그들도 나를 좋아하는 교사로는 남아 있으니까.  난 해직 기간에도, 복직한 이후에도 ‘조명이 있는 교실’이라는 교사연극단체에서 교육극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퇴임한 이후에도 연극 활동을 이어나갈 생각을 하고 있다.    


* 이 글을 쓴 강병용 선생은 국어교사로 정년을 몇 년 남겨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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