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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Dec 18. 2021

살아있는 자체로도 교사의 모범이 되셨을 선생님

고재명 선생님은 전남 고흥이 고향으로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8년에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교육과에 입학했다. (동기생보다는 나이가 한 살 더 많은 것으로 기억한다.) 


고 선생님과의 인연은 1989년 무렵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전교조 결성 당시에 일부 젊은 남자 교사들끼리 자주 의견을 나누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고 선생님은 대학시절 특별한 학생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교사가 되어서는 1987년 9월에 결성된 부산교사협의회 시절부터 서구지역 모임에서 꾸준히 활동했다. 1988년 하반기 부산 지역 사학민주화 운동의 구심점과도 같았던 경희여상(현 부경보건고등학교) 정상화 투쟁을 마치고 인근의 장림여중에서 고 선생님과 함께 차를 마셨던 기억도 있다. 그때 그는 자기 별명이 ‘고물상’이라고 알려주었다. ‘고재명 물상’을 줄인 말이라고 했다. (당시 중학교에서는 물리 교과를 ’물상‘으로 불렀다.) 1990년 고 선생님은 공립지회장을, 나는 지회 교선부장을 맡았다. 연산동 사무실 지하에서 지회 집행위원회를 1주일에 한 번씩 했는데 회의자료 등을 늘 같이 준비했다. 

     

고 선생님과는 공식적인 전교조 활동 외에도 사적으로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 고 선생님이 해직되고 나서 1990년 전교조 사무실 근처로 이사를 할 때 이삿짐도 함께 날라주었다. 고 선생님은 1988년 창간 때부터 이사할 당시까지 한겨레 신문을 모두 모아두었고 그것을 박스에 담아 연산동의 자취방으로 옮겼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다. 한겨레 신문 한 장 한 장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지금의 한겨레 신문 기자들은 이런 초기 독자들의 마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1990년부터 1992년 사이에 단위학교 현장 방문도 자주 함께 다녔고, 출근 홍보(학교 교문에서 전교조 신문 나누어 주는 일)도 함께 했었다.

     

1994년 복직했을 당시에 우리는 사하구에 있는 여중과 남중으로 각각 발령이 났다. 나는 부산서여자중학교(현 당리중)로 발령이 나고, 고재명 선생님은 우리 학교로부터 500m쯤 떨어진 사하중학교로 발령이 났다. 그때, 부산의 지하철은 1호선밖에 없었고, 서대신동역이 종점이어서 우리는 출근하면서 지하철에서 만나기도 하고, 지하철 종점에 내려서 대티터널 입구에서 버스를 갈아타면서 우연히 자주 만나기도 했다. 1995년 내가 구서동에서 연산동으로 이사할 때 고 선생님과 몇몇 지인들은 나의 이삿짐을 직접 옮겨주었다. 당연히 짜장면과 탕수육으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이후로는 서로 이사를 해도 지인들에게 연락하지 않고 포장이사를 하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한다.  

    

고 선생님은 본성이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이런 성향 때문에 학교생활은 비교적 온건하게 한 것으로 기억한다. 특별히 문제가 없으면 앞으로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고, 어지간하면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려고 노력한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대학원을 다니던 1999년 전후로 서로 연락이 뜸해졌고, 서로 자식이 생기고, 각자의 생활을 하던 시기가 되었다. 아마 이때쯤 고 선생님은 ‘추임새’라는 풍물패 활동을 했는데 부인의 부인의 영향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부인이 풍물패 활동을 했고 그래서 전교조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고 선생님도 그 인연으로 부인을 만난 것으로 안다. 2006년 가을 무렵 고 선생님이 경남으로 전출하게 된 것도 부인의 연고지가 진주였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애처가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고 선생님은 진주 근처가 아닌 함양으로 발령이 났고 그래서 두 분은 주말부부로 살아야 했다. 중학생이 된 자녀가 충주 근처에 있는 대안학교에 진학하면서 부인은 또  충주로 가시게 되었는데, 고 선생님이 불의의 사고를 돌아가신 것도 충주에서였다. 그때 문상을 못 간 것이 늘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고 선생님은 매사 특별히 나서지는 않았지만, 전교조 부산지부 지회장 등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고, 복직 이후에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교육개혁과 참교육 실현이라는 전교조의 신념을 제대로 지키려고 애썼던 분이다. 2005년 전후 부산의 영도여자고등학교에서 학년 부장을 맡으면서도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그래서 결국 부장 직무를 그만두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힘들고 어려운 세월을 모조리 겪었음에도 복직 이후 약간이나마 여유로운 삶을 즐길 시간을 가지지도 못한 채, 불의의 사고로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살아계셨으면 살아 있는 그 자체로 교사의 모범이 되었을 분이라 생각하니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 이 글을 쓴 박철호 선생은 고재명 선생과 같이 해직되었으며  몇 년 후면 정년을 맞이할 부산의 현직 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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