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3년 생으로 부산의 사립 금성중학교에서 교단에 선 것은 1981년이었다. 그해 교사인 여인과 결혼을 했다. 교사가 되기 전해인 1980년 5월 나는 전두환의 공안 당국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었다. 대학 다닐 때는 동아대 학내 민주화 운동, 유신 반대 운동에 관여했고 졸업 후에는 부산 운동권 그룹이 주축인 ‘로터리 모임’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1986년 5월 10일 토요일 오후, 나는 영남권 Y-교사들의 5.10 교육민주화 선언 대회장인 부산 YMCA 강당으로 달려갔었다. 그것을 계기로 로터리 모임 사람들에게 ‘이제부터 교육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겠으니 나를 그쪽으로 파견하는 것으로 해 달라’고 했다. 다른 무엇보다 학교 현장의 정상화와 민주화가 시급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한마디로 학교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가난하고 힘없는 학생들이 오는, 열악한 환경의 사립학교라 더 그랬던 것이겠지만 학생 체벌, 차별 대우, 촌지, 지시일변도의 비민주적인 교직원회의, 각종 잡부금, 금전 비리 등이 너무나 만연했다.
1986년 9월 6일 영남지역 Y-교사들은 ‘민족민주교육실천대회’를 부산 YMCA 강당에서 열었다. 그 일로 김관규 영남 Y 회장, 이홍구 부산 Y 회장이 해임되었고 나는 직위해제에 감봉 처분을 받았다. 1987년 9월 26일 부산교협 결성 당시는 전국적으로 불이 붙은 교협 결성에 대한 정부 당국의 탄압이 가시화되었다. 그래서 탄압의 부담을 나누는 의미로 6인 공동대표 체제로 출범했다. 나도 그 하나였는데 얼마 안 가 회장 1인 체제로 전환되면서 나는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때 아내는 내게 왜 당신이냐, 왜 당신 혼자 총대를 메려고 하느냐 하며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한 가지 에피소드. 부산 Y-교협의 대표로서 김관규, 이홍구 선생이 해직되었을 때 나는 부산 Y-교사들에게 두 선생님이 중고 책방이라도 할 수 있게 500만 원을 모으자고 제안했고 그 돈이 모였다. 하지만 두 선생님은 그 돈을 쓰지 않고 있다가 부산교협이 서면에 사무실을 구할 때 그 비용으로 썼다.
1988년 부산 교협 회장을 맡을 때부터 나는 연대 사업에 공을 많이 들였었다. 부산지역의 진보적인 노동조합,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회,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약사회, 개신교, 가톨릭 등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연결하여 봄에는 등산, 가을에는 체육대회를 통해 친목을 다졌었다. 이 모임의 정식 이름은 없었지만 우리끼리는 ‘먹물 모임’이라고도 했다. 나는 이 모임을 미구에 닥칠 대량 해고 사태에 대한 한 대비로 생각했고 실제로 이 모임은 훗날 전교조 부산 후원회의 모태가 되었다.
1989년 전교조 부산지부가 결성되었을 때 나는 연대사업위원장을 맡겠다고 나섰다. 아무래도 내가 발이 제일 넓었기 때문이고 나로선 전교조 사수 투쟁 국면에서 다른 단체와의 연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너무나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에는 연대 사업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연대 사업의 중요한 하나의 축은 참교육학부모회 부산지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 일은 초등의 두 해직 교사 김옥영, 백점단이 맡아서 정말 열심히 했다. 나는 전교조 대학위원회와의 연대에도 공을 들였는데 이는 전교조의 연구역량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일에는 해직 후 2년도 안 되어 병으로 세상을 뜬 시인 신용길이 애정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해나갔다.
부산후원회의 초대 회장은 조창섭 목사님이었고 초대 간사는 나중에 신라대 총장도 역임하게 되는 정홍섭 부산여대 교수였다. 2대 간사는 현재 부산시 교육감인 김석준 당시 부산대 교수였다. 전교조 결성을 전후로 전교조의 진실을 알리는 대국민 홍보물이 엄청나게 쏟아졌는데 그 비용의 많은 부분을 후원회가 댔다. 전교조 부산후원회는 1989년 겨울 해직교사 기금 마련 전이라는 미술 전시회를 통해 마련한 1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전교조 부산지부에 전달하고는 1990년에 해산했다. 그때는 노태우 정권의 융단폭격으로부터 전교조가 조직 복원에 나서는 등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교조 결성기 부산 초등 초대 위원장인 이성림 선생의 부친이 당신의 딸에게 폭언과 폭언을 한 교장에게 항의하는 중에 교장으로부터 “당신 딸은 빨갱이야”라는 말을 듣고는 분을 참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 목을 매고 자결을 한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분의 장례를 전교조 장으로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렇게 되었다. 그분의 아픈 죽음은 전체 교육운동 차원에서 봐야 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장례를 빨리 치르고 싶어 했지만 절차와 비용은 걱정 말라고 하고 5일장을 치렀었다. 그때 교육청으로부터 고발된 이성림 선생은 경찰을 피해 다니고 있었는데, 내가 잡혀가더라도 장례식에는 와야 한다고 말했고 그는 그렇게 했다. 이성림 선생은 청천벽력 같은 아버지의 죽음에 마음껏 애도도 할 수 없었다.
1994년 복직할 때 나는 두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부산교사신문의 복간. 교육연구소 설립. 여기에 더해 한 가지는 학교운영위원회 운동이었다. 내가 복직한 학교가 마침 6개 시범학교 중 하나였다. 나는 부산시내 시범학교 교사들의 모임을 만들고 학교운영위원회의 민주적 운영에 대해 토론도 하고 준비도 했다. 그 결과물이 <열려라, 학교운영위원회>라는 소책자였는데 그것은 전국 학교로 배포되었고 빅히트를 쳤다.
1989년 해직 사태의 역사적 의미를 묻는다면 나는 말하고 싶다. 그것은 사회변혁이든 교육개혁이든 넘을 수 없는 벽에 큰 균열을 낸 사건이라고.
* 이 글을 쓴 이광호 선생은 명예퇴임 후 민주공원 관장 등을 역임하고 지금은 함안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