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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Dec 20. 2021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의 가치는
영원하다고 여겼기에

대학 1학년 때 철학 동아리인 줄 알고 들어간 동아리의 영향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것일까를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열악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의 삶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다. 그래서 졸업 즈음해서는 노동야학을 반년쯤 한 후 1987년 5월 정도까지 공장 생활을 했다. 대학 생활 중 아르바이트도 변변히 해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내 처지에 대한 고민과 공장 생활로 힘이 많이 들었다. 그해 9월 1일 자로 부산 초량중(현 부산중)에 발령이 났다. 졸업 후 2년 반만이었다. 교사가 되자마자 부산교협에 가입하고 활동했다. 


처음 교단에 섰을 때 학교 분위기는 상명 하달식의 군대와도 같이 느껴졌다. 교직원 회의 때 교장이 일어나 일장 훈시를 하면 교사들은 조용히 받아 적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거부감이 일었고 답답도 했다. 미래의 민주 시민으로서 학생들의 올바른 지도를 위해 교사들의 힘과 지혜를 모으고 싶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같은 학교 내 발령 동기 교사를 포함해 인근 지역 교사들과 소모임을 했다. 주변 학교 교사들과의 연합 모임에도 참석했다. 같이 책도 읽고 교협 홍보물을 전해 받아 학교 안에서 교사들에게 조심스럽게 배포했다. 당시 막 일고 있는 교육 운동의 시대적 흐름을 교사들에게 알리고 동시에 교사로서 나의 정체성을 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발령 이듬해 결혼을 했고 부임 3년 차인 1989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담임을 맡게 되었다. 우리 학교는 대체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많은 학교였다. 어려운 아이들 위주로 가정 방문을 갔는데 학부모들은 촌지를 내밀곤 했다. 촌지를 받으면 돌려보냈는데 그게 어려우면 학급 활동비로 쓰고는 그걸 편지를 통해 학부모에게 알렸다. 점차 학교생활에도 적응하고 신참 담임으로 학생들 지도에도 재미를 느끼게 되었을 때 전교조 결성 운동이 시작되었다. 나도 참교육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전교조에 가입했다. 


1989년 여름 전교조에 탈퇴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해직을 종용받았을 때 나는 큰 갈등 없이 해직을 감수하기로 했다. 교사로서 사회변화의 큰 흐름에 함께 하겠다는 각오와 우리 교육의 숱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교조를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친정 부모님은 장녀인 나의 해직 결정을 엄청 반대하셨다. “대학생일 때는 가출을 해서 공장엘 나가더니 교사가 되어서도……” 하시며 아버지는 아예 나를 보지 않으려 하셨다. 그러나 내 결정을 남편은 격려해 줬고 나는 나대로 실직한 이후 생계에 대한 걱정을 별로 하지 않았다. 나는 임신 중이었지만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없었다. 해직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힘겨운 고통을 몰고 오는지는 해직이 되고 아이를 낳고 생계에 쪼들리면서야 비로소 점차 알게 되었다.  

    

징계 의결서에 따르면 나의 해직 사유는 전교조 결성 발기인대회에 참석한 것(사실 나는 그날 몸이 아파 참석을 못했다), 학교에서 전교조 관련 유인물을 뿌린 것, 모금 활동을 한 것 등등이었다. 해직이 되고는 지부에서 상근자로 활동했다. 해직 이듬해 1월 첫 딸이 태어났다. 여성부에서 일했는데 육아로 활동에 제약이 많아서였다. 나는 아이도 키워야 하고 가사도 해야 해서 힘이 많이 들었다. 지부로부터 받는 30~50만 원 정도의 상근 활동비가 주 생활비였다. 어쩔 수 없이 친정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나는 해직무효소송에서 승소를 해서 그간 받지 못한 월급을 한꺼번에 받고 다른 승소자들처럼  1994년 4월에 원상복직이 되었다. (우리 승소자들은 지부에 일정한 후원금을 냈고 지부에서는 그 후원금을 장학금으로 사용했다.) 복직을 해보니 학교 분위기가 5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신자유주의의 폐해는 학교 안에서도 심화되고 있었다. 

      

끝으로, 명예퇴직을 하는 과정에서 해직교사였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억울하고 어처구니없는 사건 하나를 이야기해 두고 싶다. 1989년 봄 부산시 교육청은 다른 시·도 교육청과는 달리 국공립학교의 전교조 해직교사를 모두를 경찰에 고발했었다. 그래서 많은 선생님이 도망을 다니기도 하고 구치소에 몇 달씩 수감 되어야 했다. 나 역시 교육청으로부터 고발이 되어 형사재판에서 집행유예를 받았었다. 그렇지만 1994년 봄에 나도 복직을 했고 그후 아무 탈 없이 학교를 나갔다. 그랬기에 2019년 2월 자 명예퇴직이 확정된 후 연금관리공단에 연금 확인을 했을 때도 내가 받을 연금 액수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2월에는 퇴임 기념으로 인도로 여행도 다녀왔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연금관리공단에서 전화가 와서 내 이력서를 한 장 보내 달라고 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하는 말이 ‘선생님은 1991년에 집행유예라는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그 후 사면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복직해서 근무한 것 자체가 사실은 문제였다, 다시 말해 공무원 자격이 없는 데 계속 교사로 근무한 것이다, 이제 와서 그간 받았던 월급까지 추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연금은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였다. 충격이었다. 그래서 확인해 보니 같이 해직된 선생님들 중에 해고무효소송에서 승소하고도 형사재판에서 실형인 집행유예를 받은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다들 기소중지, 선고유예 등을 선고 받았던 것이다. 해직 당시는 정권 측이 마구 휘두르는 폭력으로서 그것이 집행유예가 되든 징역형이 되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겼었는데…! 지금까지 나의 삶이 모조리 부정당하고 발밑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부산시 교육청의 협조를 비롯하여 동료 해직교사들과 남편, 선배 등의 도움으로 국민권익위원회에 까다로운 서류가 첨부되는 민원을 제기하여 결국 연금을 받게는 되었지만 그것은 복직 후 근무 기간만 인정한 연금이었다. 아, 내가 전교조만 생각하지 않고 연금의 ‘연’자에라도 관심을 가졌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교조와 함께 한 내 삶을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내가 전교조 교사로 살아온 것은 교사가 교육 노동자로 뭉쳐서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고 그럼으로써 내 자식을 포함한 나의 후세대들이 보다 민주화된 세상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며 살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 이 글을 쓴 이는 최미화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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