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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Dec 20. 2021

거대한 역사의 격랑 속에
내 몸을 맡겼다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이 되는 1987년 그해 초에 부산대학교를 졸업하고 3월에 학산여고에 새내기 교사로 들어갔으나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가 그렇듯이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해에야 3개 학년이 완성된 신설 학교라 같이 학교에 들어간 동기가 10명이 넘었을 정도로 20~30대 교사들이 과반을 넘기는 학교였는데, 교장, 교감의 횡포가 도를 넘었다. 교감은 학생들 앞에서 젊은 교사들을 나무라는 게 다반사였고 매일 하는 아침 교직원 회의에서 교장은 아예 자리에 앉아서 발언하였다. 학생들이 8시까지 등교하기 위해 시간을 아끼느라 일찍 학교에 와서 세면대에서 세수며 칫솔질을 하는 것을 정신이 해이해져 그렇다면서 못 하게 하고,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 학생들이 교실에 형광등을 켜는 것을 절약 정신을 키워야 한다며 불을 못 켜게 막는 그런 사립학교의 현실에서 87년 6월 항쟁은 아이들에게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다. 


6월 항쟁이 터지기 바로 직전인 그해 5월 30일 아이들은 운동장 전체조례가 끝나고 마지막 교가를 부르는 순간에 애국가를 불렀다. 학교는 교실로 입장하라고 지시했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모두 운동장에 남아 3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연좌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는 당시 부산일보와 국제신문에 단신으로 보도되었는데 보도 내용에 따르면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학교 족벌 운영 시정’, ‘교감 선생님은 학생들 앞에서 교사를 나무라는 등의 비교육적 행동을 삼갈 것’, ‘학교 식당의 음식 질을 높여줄 것’, ‘음료수 자판기를 더 설치해주고 값도 1백30원에서 100원으로 낮춰줄 것’ 등이었다.   

  

난 대학 다닐 때 이념 서클과는 관련 없이 살았으나 검정 야학을 했던 관계로 김영준 선생, 이헌용 선생과는 야학 일로 자주 만나던 사이였고 학산여고로 전근 갔을 때는 학교의 이런 부당한 일에 대처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그 선생님들과 자주 만났다. 그래서 같은 학교의 민병창 선생과 나는 자연스럽게 부산교사협의회에 가입하고 양정동의 반지하사무실에도 나가고 했다. 


난 당시 운동의 관점에서 교육 운동을 바라볼 수 있는 지적인 역량이 없었고 나이조차 27살에 불과한 신출내기 교사였다. 다만 교육 현장의 부조리한 현실에 좌절할 즈음 부산 교협을 만났고 당시 시대의 거대한 격랑과도 같았던 강물의 한 줄기에 몸을 맡겼을 뿐이다. 워낙 관련 지식이 없었던 교사 새내기 시절이었던지라 내가 해직되는 게 맞는가 하는 고민을 참 많이 했다. 


당시 미혼이었던지라 생계의 고민은 별로 없긴 했다. 다만 부모님을 설득하는 게 문제였는데 몇 차례의 끈질긴 설득 끝에 부모님에게는 허락받았으나(지금 생각하면 부모님도 참 대단하신 분이다) 정작 나 자신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게 고민이었다. 당시 지도부였던 이홍구 선생을 만나 고민을 상담했는데 이홍구 선생은 웃으면서 흔쾌하게 내게 말했다. “짤리면서 큽니다.” 두 번째로 만난 선생은 박철호 선생이었는데 나의 상황을 듣더니 “샘은 그냥 학교에 남아서 현장을 조직하는 게 훨씬 나을 듯합니다.”라는 답을 주었다. 결론이 나지 않아 마지막으로 찾아간 사람은 박덕수 선생이었다. 서너 명 선생님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였는데 박덕수 선생은 딱 부러지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들 술기운이 오르면서 그 술자리는 자연스레 해고 출범식 같은 것이 되어갔다. 우스운 일이라 하겠지만 나의 해직은 술기운으로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후 정부의 집요한 탈퇴각서공작이 기승을 부려도 내 마음은 한 켠도 흘들림이 없었다. 술기운에 그 중차대한 결정을 했지만 처음 먹은 마음을 끝까지 지키로 힘든 일도 감수하고자 했다. 


생각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부산여대 앞 2층 전교조 부산지부 사무실 벽 대자보에는 징계에 회부된 순서대로 이름과 학교명이 1번부터 세로로 쭈욱 적혀 있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1번부터 5번까지는 당시 부산지부의 지도부를 맡은 주요 인물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내가 6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 이름 밑으로도 연달아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해직을 결의한 후  탈퇴각서를 쓴 경우는 이름과 학교 위에 줄을 긋기로 했는데 내 앞의 5번까지는 아직 아무도 줄이 그어져 있지 않았다. 내가 만약 탈퇴각서를 쓴다면 첫 번째로 줄이 그여질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일단 너무 창피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너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다. 내가 해직을 택한 이유 중의 하나다. 그 후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72명의 부산 해고자 중 40여 명 정도가 상근으로 사무실에 남았고 나 역시 거기에 포함되었다. 복직까지 4년 반의 상근 기간은 내가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학습을 통해서 공부하고 토론하고 거리 현장에서 실천하면서 나는 대학 시절 연을 맺지 못했던 운동권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해직의 삶은 부산의 웬만한 경찰서 유치장은 대부분 섭력하였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당시 전국의 모든 해직교사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련의 기간 대부분은 오히려 감사의 시간으로 채워졌다. 전교조를 백안시하는 지금 시대에서 생각하면 황당할지도 모르지만 당시엔 학생 학부모를 포함한 대다수 국민은 우리를 지지해 주었고 늘 우리들의 방패이자 비빌 언덕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우리는 4년 반의 긴 시간을 눈물과 감사함과 고마움으로 헤쳐 나왔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1994년 복직한 후에도 나는 부산지부 공립해운대지회의 지회장을 4년에 걸쳐 하고 2011~ 2012년에는 박덕수 지부장을 모시고 사무처장을 맡아 일했다. 2년 동안 사무실에서 상근을 하였다. 박덕수 선생님과는 젊은 시절 해직과 관련해서도 인연이 있었고 50대엔 지부장-사무처장으로도 같이 일했으니 그 인연도 내 인생에서 참 고마운 인연인 셈이다.


다음은 1989년 여름 해임 의결서를 받은 직후 재직 학교의 교무실에서 읽은 개인 성명서다. 


오늘, 교사에게는 사형과도 같은 해임 의결서를 통지받고 느끼는 심정은 실로 착잡하다. 헌법에 보장된 교육의 자주성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나에 대한 징계의결이 먼저 재단 측의 독자적인 교육적 판단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교육구청의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중징계 의결 요구에 근거해 교육구청의 단순한 하수인의 자격으로서 재단 측이 징계의결을 결정했다는 사실에서 이 땅의 참담하게 유린된 교육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저들이 그렇게 목청 높여 주장하듯 진정 교직이 성직이라면 어떻게 성직에 몸담고 있는 나의 목숨이 하찮은 파리 목숨보다도 더 못한 것인가? 그 무슨 죽을죄를 졌길래 징계 당사자인 본인에게 소명의 기회조차 주지도 않고 2차 징계위에서 해임을 결정하였으며, 그 무슨 몹쓸 짓을 내가 저질렀길래 학교를 떠나는 이 마당에 아이들과의 마지막 만남까지도 못하게 막는가?  진정으로 학교 당국이 교육의 백년대계를 생각하고 온당한 교육을 정착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렇듯 쉽게 중징계 의결을 할 수 없으리라 결단코 믿는다. 해임이라는 중징계의 징계사유의 부당함은 개인적으로 재심을 청구할 것임은 물론 먼저 여기서 두 가지 문제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어찌하여 교원노조 관련 교사의 징계에 대하여 87년도의 나의 여고 재직 시절의 문제가 징계사유가 되는 것인가? 이른바 87년의 5월 30일 있었던 학생들의 집단시위는 그 당시 학교에 재직했던 수많은 교사들이 주지하고 있듯이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며 그때 학생들이 재단 측에 요구한 사항은 그 당시 부산일보에도 기사가 게재되었던 그대로 재단의 비리 척결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교단에 선지 겨우 3개월밖에 되지 않은 햇병아리 교사에 불과했던 그 당시의 본인이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재단은 생각하는가?      

설혹 만분지일이나마 내가 그 일에 관련이 되었다손 치더라도 교원의 징계시효 기간은 2년일진대 어떻게 2년이 경과한 사건을 두고 나의 징계사유로 삼으려 하는가?  둘째,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담보하고 좀 더 나은 교육환경을 이룩하고자 결성된 경향각지의 평교사협의회는 진작부터 문교부에서 인정한 임의단체이며 단위학교인 학산여중에서도 학교현장의 실질적인 문제를 놓고 토의하고 일을 수행해 나가는 현존하는 실질적인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학산여중 평교사협의회 소속의 회원이라는 것이 어찌하여 징계사유가 되는가? 이제 굴종과 예속의 교육이라는 오명의 탈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교사, 학생, 학부모가 교육의 진정한 주체가 되는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의 우렁찬 함성이 메아리치기 시작한 이때 아직까지도 과거의 구태의연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양심적인 교사들의 생명선을 자르고자 하는 저들의 행동에 한없는 분노와 연민을 느끼면서 한 번 더 나에게 내려진 해임이라는 부당징계의 즉각 철회를 요구하며 이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때의 모든 사후 책임은 재단 측과 학교 당국에 있음을 거듭 밝힌다.  

1989. 7. 31   교사  이상균


* 이 글을 쓴 이상균 선생은 곧 정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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