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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Dec 11. 2021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부끄럼도 모르는

1989년 전교조의 봄날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슬프고 무서운 이야기 하나 

                


1979년 부산의 천주교 재단 학교인 00공고. 나는 교단 첫발을 디뎠다. 형편 어려운 아이들이 모이는 야간 공고에서 평생을 이 아이들과 함께 하리라, 제법 야무진 다짐을 한 교단이었다. 

1979년 부마민중항쟁 그리고 독재자 박정희가 총 맞아 죽음. 1980년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 서울의 봄! 그해 오월, 느닷없는 군인 전두환이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탱크를 앞세우고 독재자로 등극.


이때부터 이 땅의 백성들은 누천년 이래 겪어보지 못한 갑갑함에 억눌린 채 신음하게 된다. 학교라고 해서 그 갑갑함에서 놓여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신음 속에서 나날을 살아야 했다. 내 동생이 당한 연행 고문 옥살이는 오히려 내가 숨 쉴 수 있는 숨통이었다.


1982년 학교에서 나보고 같은 재단 산하의 00중학교로 가라고 했다.  


“국어과 어느 교사도 이곳 야간공고를 희망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야간 공고에 있으려고 다짐한 사람입니다. 여기 있겠습니다.”


“(잘난 체 하기는!) 여기보다 거기 가면 더 재미날 거야. 교장이 널 걱정해. 아이들과 어울려 데모대 따라다닌 일을 안 잊어버리더라.”


더 이상 끽 소리 못 했다. 중학교로 갔다. 얼마 뒤부터 나는 주장했다. 


“남자 아이들이 가장 예쁠 때가 몇 살 때게? 이건 중학교 선생 노릇 안 해 본 사람은 절대 몰라. 바로 중학교 1,2학년 때!”


잔털이 보송보송한 아이들이 새 교복을 입고 긴장해서 앉아 있던 모습, 요즈음은 볼 수 없는 30년 전의 모습이겠지. 글쓰기 공부를 하고, 학급문집을 만들고, 교내 벽신문을 만들고, 시화전을 하고, 연극을 하고.... 교직 5,6년차 나이 서른 두셋.


돌아보니 참 젊었구나. 학교에서 쉬지 않고 활동을 하면서도 마치고 나면 선배 선생님들 따라 술집을 몇 차 돌았고, 마지막에는 내 또래에다 마음도 딱 맞는 신선생과 한잔 더 하고야 집으로 갔지. 그때 배운 게 참 많았던 것 같다. 게다가 부산YMCA교사 협의회를 만들고 회장 일을 맡았다. 안으로 밖으로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그러나 신나는 학교생활은 오래 가지 못 했다. 느닷없이 작년에 내었던 학급문집의 내용이 불온하다는 것이다. 재단 사무국으로 갔다. 교육청에서 해임을 시키라는 압력이 내려오는데 우리 재단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그러나 감봉 정도 징계는 해야 될 것 같다.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새 학기에 다시 학교를 옮겨야 했다. 징계 받은 교사는 그 학교에 있을 수 없단다.


1986년 내 나이 서른넷. 8년째 접어드는 교사 생활. 아무 막힘도 없고 두려움도 없었다. 곳곳에서 교사들은 교육민주화를 선언하고 나섰고 전두환의 철권통치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나는 00여고로 학교를 옮겼다. 나는 아이들한테 빠져들었고 아이들은 내 수업에 빠져들었다. 한 시간 한 시간 수업이 늘 감동으로 이어졌다. 행복했다. 그러나 아! 아이들하고 지내면서 느끼는 행복감이 커 갈수록 교무실 동료들의 질시의 눈빛은 예상하지 못 했다. 이곳은 공고와 중학교 교무실과는 판이했다. 


알고 보니 중학교 교무실은 재단 학교들의 양로원이었고 공고는 전공 교사들은 붙박이고 일반 과목 교사들은 마지못해 밀려난 교사들의 정거장 정도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00여고는 재단 안의 학교들 중 가장 젊고 빠릿빠릿한 교사들을 모아 두었고 부장들도 학교에 충성을 다 하고 있었다. 학교는 교장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분위기 속에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도 그런 일사불란한 분위기 속에서 순종과 겸손을 미덕으로 아는 태도가 뿌리박혔는데 새로 들어온 국어 선생 하나가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을 데리고 학교를 흔들어 놓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겠지.

 

“이승만이 반민족특위를 해산하고 친일파들과 손잡고 일했다면서요?”

“<낙엽을 태우면서>에 나타난 이효석의 삶을 아름답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까?”


아이들은 선생들한테 대들기 시작했다. 선생 하나가 우리 학교의 전통을 흔들어 놓는구나. 선생들 걱정은 깊어갔다. 그즈음 나는 다른 학교 선생님들과 어울려 국어교사모임을 결성했고 전교조 결성의 주춧돌을 놓느라 여념이 없었다.


1989년. 전교조 결성 D-day가 잡혔다. 경찰 장학사 행정직은 긴밀한 협조를 자랑하며 우리를 옥죄어 왔다. 그 당시 내가 겪은 일을 다시 떠올리기 괴롭다. 그냥 쉽게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김 선생

우리가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면 어떻게 할까? 멀리서 어느 한쪽이 먼저 상대를 발견했으면 알아서 피하여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려 했겠지? 어쨌거나 피할 수 없이 맞닥뜨렸다면? 악수를 하겠지. 잘 있냐며. 얼굴이 좋다며. 손자 이야기도 슬쩍할지도 모르고. 아, 그래 일이 있다고? 응 나도. 그래, 잘 가시게. 그렇게 돌아서겠지. 돌아서며 입에서 절로 흘러나오는 말, “개새끼....” 당신도 당연히 “시팔늠” 정도는 내뱉었을 거야.


무슨 원한이 이토록 깊겠나 싶지만 내 입에서는 틀림없이 이 말이 흘러나왔을 거야. 세월이 약이란 말에도 공감하고, 나이 들고 보면 어지간한 옛일은 다 추억으로 눙치게 된다고들 하지만 난 아직도 당신의 선생질을 용납할 수가 없네. 물론 당신도 나의 선생질에 게거품을 물고 성토하리라 믿고 있네.


당신이 나한테 대놓고 엉겨 붙은 때가 있었지. 학기 초 담임들 회식자리였어. 내 맞은편에 비틀거리며 털썩 주저앉더니 맥주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지.


“이 선생, 오늘 이 술 묵고 죽읍시다.”


‘내가 왜 니하고 죽어?’ 싶었지만 순순히 잔을 받았어. 당신은 이 학교에 터를 잡은 지가 4년째 고참이고 나는 중학교 있다가 올해 온 신참 아닌가. 술꾼이 건네는 우정의 표시쯤으로 생각했지.


“이 선생은 수업이 감동적이라야 한다고 생각하요 이성적이라야 한다고 생각하요?”


억지로 술기운을 걷어내며 묻는 말에 조금 감동하기도 했어. 


“문학을 공부할 때는 감동, 비문학을 공부할 때는 이성! 이러면 답이 될까?”


“나는 문학도 이성으로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요. 왜냐! 선생의 가치관이 들어가서는 안 되니까. 작품을 보는 눈, 분석하는 힘, 그리고 문학 지식 이것만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니냐 이 말이야. 어이 함 선생 내 말 틀맀소? 사회 선생인 나도 아는데 함 박사가 모를 리 있나?”


사람한테는 감수성이 아주 소중하다. 이게 삶에 윤기를 주고 자기 주체를 세우는 힘이 된다. 감수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작품을 읽고 감동할 줄 아는 심성이 필요하다. 감성은 설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활에서 몸소 겪어야 한다. 지식처럼 암기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내 딴에는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당신은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어. 그리고 마침내 중얼거리듯 내뱉는 말, 


“여고생은 남자 중학생 하고는 달라..... 선생 말 한마디가 무섭다고.... 의식화 교육 그만 하시라 이 말이요..... 지난 4년 동안 우리 학교 이미지를 겨우 바꿔 놓았는데 아이들이 흔들리고 있어.... 오늘 특활반 모집 봐...”


“오늘 특활반 배정을 두고 하는 말인가? 나는 그냥 <삶을 가꾸는 글쓰기> 반 모집 공고를 내놓고 있었을 뿐이야. 당신들하고 달랐던 건 학년 게시판에 안내문을 붙여 둔 것뿐. 많아야 20명 정도 모이겠지 생각했는데 100명도 넘게 몰려들었던 거야. 소란 피워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야? 의식화 교육하지 말라고? 그럼 혼수상태 교육을 할까? 당신이야말로 의식화 교육 좀 받아야겠네.”   

  

김 선생. 당신이 아이들 생각하는 모습, 어떨 때 보면 갸륵하기도 해. 아침 일찍 학교에 와서 자습 지도 그리고 시간표 따라 수업, 마치고 나면 저녁 먹고 9시까지는 학교에 있었지.  집안일도 뒷전으로 자기 아이도 뒷전에 두고 반 아이들만 데리고 사는 것 같았어. 다른 사람들은 휴게실에서 바둑이나 두다가 자습 지도 수당만 받아간다 싶었지만 당신은 달랐어. 걸핏하면 아이를 불러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애는 고개를 숙인 채 우는지 어쩌는지. 우리 반 교실은 열댓 명 남아서 공부를 하거나 엎드려 자고 있는데 당신 반은 열외 1명도 없이 전원이 앉아 있었지. 아주 칼 같은 반이었어. 우리 반도 저랬으면 싶을 때가 있을 정도였어. 그렇게 해 주는 것이 아이들한테도 좋고 당신한테도 좋다고 했지. 당신은 참 솔직했지. 자기가 열심히 하면 학부모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데 그걸 안 받을 이유가 없다고. 당당히 요구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내가 부산지부 결성 대회에서 연설하는 것을 티브이에서 본 당신은 우리 반 수업에 들어가서 한 시간 내내 반복해서 말했다지요.


“너거 담임한테 맞아 죽을 각오로 너희들한테 부탁한다. 너거 담임한테 들었던 모든 이야기뿐 아니라 기침소리까지도 다 지워내어라. 그것들은 너거를 잡아먹는 괴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십 년이 지났소. 당신은 꼭 교장이 될 것이라고 나한테 다짐하더니 끝내 당신 뜻을 이루지 못하겠던 모양이지요. 난 당신이 왜 교장이 못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소. 당신은 1년 열두 달을 아이들 곁을 지킬 줄만 알았지 왜 지켜야 하는지를 생각 못한 때문이오. 그보다 상대가 너무 세었어요. 당신 자리 꿰찬 박 선생은 제 작은 선행을 열 배로 부풀려 말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철면피를 가졌지 않소. 부끄러움을 모르는 놈보다 힘 좋은 사람 없지 않더이까. 

 

* 이 글을 쓴 이상석 선생은  정년 퇴임 후 삶을 가꾸는 글쓰기 운동을 하는 한편 평화통일시민모임인 '북녘동포에게 편지쓰는 사람들'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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