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신용길, 교사 신용길은 1957년 서울에서 가난한 집 장남으로 출생하여 1976년 부산 동아고를 졸업, 부산대 사범대 국어교육학과를 입학했다. 대학 시절 문학 동인 활동을 하며 김춘수 시인에 경도해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주로 썼다. 그러나 ‘공포 영화’, ‘아우슈비츠’ 등의 연작시가 보여주듯 박정희 유신 체제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시인 본래의 저항 의식이 번득이는 시들도 적지 않게 썼다.
1984년 주례여중에 첫 부임을 했고, 다정다감하면서도 다혈질인 그를 아이들은 많이 따랐다. 집에서도 여동생들이 부모보다 더 신뢰하는 ‘큰오빠’였다고 했다. 그의 시 ‘여상 학생 동순이’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시를 쓰고 있는 만년필/ 동순이가 졸업식 때 수고하셨다고 사 준 만년필/ 연쇄점 하는 아버지 돕고/ 오빠 대학 갈 수 있게/ 여상으로 간 동순이/ (……)/ 시든 꽃처럼 향기 없는 동순이/ 언젠가 팔팔 웃는 모습 보나
1987년 그는 나중에 해직되는 구덕고로 옮긴다. 그해 결혼도 하고 ‘현대문학’지에 시인으로 추천 완료. 이듬해는 아들이 출생한다. 구덕고에서는 학생들에게 매도 드는 좀 괄괄한 교사였다지만 그 학생들은 나중에 그가 해직되었을 때 학교에서 시위를 벌였고 해직 2년째 그가 병마에 쓰러졌을 때는 ‘신용길 선생님 추모사업회’를 만들어 그 후 30년이 되도록 추모제를 이어갔다.
그가 교사·교육운동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87년 9월 28일 민주교육 추진 부산교사협의회 창립 대회 때 ‘마침내 거름 좋은 흙으로 드러누워’란 제목의 자작 축시를 뜨겁게 낭송함으로써였다.
‘햇살 부셔 넉넉한 날/ (…)/ 부산 교사 다시 태어난 날/ 부산 교육민주화의 깃발 높이 치켜세운 날/ (…)/ 교사여, 민족의 선생이여/ 어깨 함께 걸 30만 교사여/ 죽음이 가득 찬 교실/ 직임의 가르침이 득세하는 교실에서/ 뛰쳐나오라, 나와서/ 삶의 의지로 다시 태어날/ 민주교육, 민족교육, 통일교육의 밭고랑에/ 나란히 서 보자’
술은 잘 못 마셔도 애연가였던 그가 부산 교협 문화부장이 된 때부터 전교조 결성기 구덕고에서 조합원 딱 두 명인 분회를 결성하고 파면당할 때까지는 일 년도 채 안 걸렸다. 해직 후 경찰의 수배가 떨어졌고 그는 지부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몸을 피해야 했다. 그러나 여름방학이 끝나고 첫 출근투쟁을 하러 간 날 경찰에 붙잡힌다. 그는 구치소에서 단식투쟁을 벌이다 쓰러졌고, 병원으로 실려갔으며 1989년 9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시인의 영혼에는 불덩어리가 폭발했다.
나에게 과격하다 이름 붙이지 마라
1989년 여름의 대학살을 기억하리라
출근하는 교사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삼복에 개 잡듯이 끌고 가던 정보과 형사들
(……)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려보겠다고
이 나라 민주주의를 실현시켜 보겠다고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꿈꿔보겠다는 우리에게
그들은 핏물 낭자한 칼날을 들이대었다.
(……)
나는 똑똑히 기억하리라
평생 잊지 않으리라
1989년 한국 여름의 교육대학살을
나를 과격하게 만든 이 역사적인 사건을
-‘1989년 한국 여름 그리고 교육대학살’ 부분
몸이 고단하고 또 아픈 와중에도 그는 부산지부 교과위원장을 맡아 한창 불이 붙은 교사들의 교과별 모임 운동을 지원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부산지부교과연합 준비 모임 결성을 주도했으며 제3회 교육주간 문화 기획 및 진행도 맡았다. 부마항쟁 공동수업 자료집 발간에도 참여했다. 그가 다른 무엇보다 공을 들인 것은 부산지부 산하에 교육연구소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야 교육도 교육운동도 보다 차원 높게 할 수 있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산지역 민교협 교수들을 만나 밤샘 토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래 몸이 약한 편이고 잔병치레를 자주 하던 그였다. 해직과 구속을 겪으면서 그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다. 해직 이듬해 11월 위암 진단을 받았고 투병 끝에 그는 이듬해 3월 9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영면한다. 1989년 교육대학살의 첫 희생자였다. 전교조 교사들과 전교조를 사랑하는 시민 학생들은 전교조 장으로 그를 보내어야 했다. 1991년 전교조는 그에게 제2회 참교사상을 수여한다.
다음은 그의 아내였던 시인 조향미 선생이 쓴 회고의 글 마지막 대목이다.
‘가난하고 외롭고 뜨겁고 격렬했던 34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뒤, 남은 가족들은 어찌 살았을까. 늙은 부모와 젊은 아내 어린 아들. 그들의 모든 슬픔과 아픔과 고독과 방황은 그 자신들의 몫이었다. 남은 자들에게 부여된 생의 과업, 업보였다. 자신의 모든 생을 불살라 참교육의 제단에 바친 시인, 교사 신용길. 그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는 충분히 할 일을 다 했고 잘 살았다. 그는 영원한, 뜨거운 여름의 시인이고, 형형한 눈빛의 참교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