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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Dec 17. 2021

오래된, 눈물처럼 맑은 기억들


명예퇴직을 하던 2015년 3월 1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니 어제까지의 교단생활이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광활한 우주의 어느 먼 별에서 순간 이동하여 낯선 별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 것 같았다. 교단생활에서 아이들에 대한 기억만 가득할 뿐 다른 기억들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1989년 당시 나는 부산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의 전교조 분회장이었고 10여 명의 조합원 중 동지 최갑진 선생과 함께 해직되었다. 해직을 막겠다고 아이들이 집회를 열고 징계위원회 회의장을 점거하고 수업을 거부하고 새 담임의 조종례를 거부하였으나 우리는 부산에서 제법 이른 시기에 해직을 당하고 말았다. 


해직 상황에 이를 때까지 양가 부모님께도 상세히 말씀드리지 않았고 아내와는 상의라기보다 그냥 내 생각을 차분히 전달하는 방식이었고 지금처럼 아내는 묵묵히 그냥 따라주었다. 그리고 1~2년 고생하면 복직될 것이라는 판단에 외벌이임에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해직되던 그해 늦가을쯤 부산대학교 집회에서 윤영규 선생님 사모님께서 해직기간이 짧지 않을 것이고 적어도 5년 이상은 걸릴 것이라는 말씀에 깜짝 놀랐다. 


그해 겨울 셋째가 태어나고 몇 달이 지나니 가계 재무상태가 부도에 이를 지경이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부랴부랴 시골 부모님 댁으로 내려갔다. 나는 당시 우리 집안 소문중 생존자 중 유일한 대졸자였고 내가 태어날 때 같이 태어난 마을의 18명 남녀 친구들 중에서도 유일한 대졸자였다. 친구들의 실망이 컸고 동네 어른들이 혀를 차기도 했다. 


나는 교사가 되기 전 꽤 오래 직장생활을 했기에 세상사에 순응적이었고 민주주의 의식이 특별히 투철하지도 못한 그야말로 평범한 교사였다. 해직 후 부산대학교에서 제자들과의 만남의 시간이 있었는데 제자 중 한 명이 선생님께서 해직될지 몰랐다고 오히려 놀라워했다. 교사가 꿈은 아니었지만 소통을 잘해 동료나 아이들과의 생활은 유쾌했다. 계성여상으로 발령받고서는 야간반 아이들을 가르치고 낮에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계속했다. 


나도 아이들도 주야 모두 바빴지만 담임이 되면 우리 반 모든 아이들의 집을 가정방문했다. 가정환경을 모르고서는 아이들의 학교생활 전반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인문고와 실업고 학생들의 가정환경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가 지각을 했을 때 왜 이제 오느냐고 야단을 해야 할지 그 집안 사정에서 지금이라도 학교에 오니 장하다고 말해야 할지를 구분할 수 있다. 


가정방문을 할 때는 집안 가족사항을 확인하고 밀감이나 사과 등의 과일을 사 갔다. 혹시 받은 촌지는 집에 돌아와 학부모님께 편지를 써서 그다음 날 아이들 편으로 모두 다시 돌려드렸다. 가정방문에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보고 나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모든 아이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긴다면 몇 권의 책이 필요할 것이다. 더 챙겨주지 못해 교단생활 내내 아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이의 이야기가 많지만 간단히 한 아이만 소개하며 글을 맺을 것이다. 


개학 첫날 조례 대신 나는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일 년간 학급 공동체의 지향점을 말하고 이를 위해 함께 노력해나가자고 협조를 구했다. 협조를 구하는 내용 중 첫 번째가 모든 아이들의 집을 방문할 테니 좀 곤란하거나 불편해도 이것만은 꼭 동의해 달라고 말했다. 곤경에 처한 가정 사정을 보이기 난처해하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여러 번 설득하여 꼭 가정방문을 했는데 처음엔 집안 사정으로 곤란해하던 아이들도 곧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과정으로 잘 받아들였고 이것이 1년간 아이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유일하게 가정 방문을 하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 여러 차례 간곡히 거절하는 바람에 가지 않으마 하고 가정방문을 포기했다. 대신 사정이나 말해 줄 수 있느냐고 하니 여러 권의 공책을 합친 두터운 두 권 노트를 내놓는다. 이것이면 가정방문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란다. 일기장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인 지금까지의 생존 기록이다. 아무도 본 적 없는 일기장이란다. 초등학생의 비뚤비뚤한 글씨 속에 슬픈 사연들이 빼곡하다. 


초등 5학년 때 몸져누워 계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 2남 1녀의 자식들을 키우는 어머니의 삶과의 투쟁, 장애를 안고 태어나 장애를 앓던 오빠가 아무런 의료혜택도 교육혜택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나던 날 오빠의 곁을 지키는 모습, 도시락을 한 번도 가져가 먹어보지 못한 이야기, 그래서 소풍과 수학여행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생과 자신의 이야기, 친구들 소풍 가는 날, 소풍 가고 싶어 하는 동생이 길가 전봇대를 붙잡고 친구들 모습이 모두 학교 교문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전봇대를 잡고 빙빙 돌고 있는 모습, 점심시간에 배가 고파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이야기, 물을 그냥 마시면 금세 배가 꺼지고 진짜 배를 채우려면 수돗물을 틀고 숨을 멈추고 물을 목으로 그리고 위로 직행시켜야 배를 채울 수 있다는 기법. 의학적으로 가능한지는 모르나 그 시절 그렇게 물로 배를 채워야 했던 거짓 같은 이야기. 중학교를 졸업하는 그 추운 겨울방학 때 힘든 어머니를 돕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철야근무를 했던 일, 몇 시간의 휴식 시간에 섬유공장의 섬유 조각 더미에 들어가 잠을 자던 일, 30일 동안 일하면서 29일을 철야 근무하다가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마지막 하루는 조퇴하던 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며 밤새워 이 일기를 다 읽었고, 밤을 꼬박 새운 이 일기책의 주인은 이름도 다소 특별한 장니나이다. 


나에겐 아이지만 이미 50이 넘어 세상의 이치를 다 깨쳤을 것이고 나보다 더 훌륭한 시민으로 살아갈 것임이 너무나 자명하다. 초임 발령 2년을 제외하면 나는 일부러 직업교육만 택했고 수많은 니나와 만나며 교단생활을 했고 그들에게 행운이 가득하길 응원하고 기도했다. 이 아이들과의 만남이 지금의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10여 년 동안 지역의 환경운동과 시민운동을 하게 하였고 내가 사는 작은 시골마을의 이장으로 봉사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도 눈물처럼 맑은 그 기억들이 나를 밀고 가기 때문이다.


* 이 글을 쓴 이는 박광호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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