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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Dec 11. 2021

그땐 그래야 마땅했고 피할 생각도 없었다

- 나의 전교조 1989년 봄과 여름

전교조가 탄생한 1989년의 날들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앞을 가로막는 것은 전교조 선생님들을 사랑했기에 온몸으로 선생님 지키기에 나선 무수한 학생들과 끝내 해직 대열에는 설 수 없었던, 눈물로 ‘탈퇴각서’에 거짓 도장을 찍어야 했던 ‘동지’들이다. 요컨대 내가 해직 대열에 섬으로써 얻은 자유와 자긍심은 빚투성이의 자유요 자긍심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나는 1957년 대구생으로 1985년 3월 부산진여고에서 교직의 첫발을 디뎠다. 자주적 교원단체인 전국 교사협의회(전교협)가 전교조 즉 노동조합으로의 전환을 결의하고, 이에 정부가 교원의 노조 결성은 불법임을 분명히 하면서 파면 등 중징계를 공언할 때부터 나의 해직은 기정사실과도 같았다. 1986년 터져 나온 ‘5.10 교육민주화 선언’과 동년 9월 6일의 ‘영남권 민족민주교육 실천대회’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진작 교육청으로부터 ‘문제교사’로 지목되었고 감봉 3개월의 징계도 당했으며 민주교육 추진 부산 교사협의회가 출범할 때는 6인 공동대표 중 하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랬으니 전교조 결성기에도 맨 앞줄에 서게 된 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전교조 결성 한 달여 전인 4월 30일 나는 부산 교협에서 활동하며 만난 동지 여교사와 결혼을 했는데 같이 전교조 활동을 해온 아내는 자신은 학교에 남아 우리의 생계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전국적으로 부부 해직교사가 없지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역할분담’에 특별한 이견도 갈등도 없었다. 물론 결혼하자마자 실직을 하게 된 나를 두고, 또 그러한 나를 말리지 않는 아내를 두고 양가 부모님들은 크게 근심했지만 그렇다고 내 면전에서 직접적으로 우리의 행동을 말리거나 눈물로 호소하진 않으셨다. 우리 부부는 그저 앞만 보고 내달릴 뿐이었다. 거대한 물결에 몸을 내맡긴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왜 막 태동하기 시작하던 교사·교육운동에 아무런 주저 없이 뛰어들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학교가, 교육 현실이, 또 상당수 교사들이 너무 답답하고 엉터리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나 사이엔 달리 문제가 없었다. 아직 애송이 청년 교사인 나를 꽃송이와도 같은 여고생들은 과분한 신뢰와 사랑도 보냈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이 처한 입시 지상주의, 경쟁 일변도의 교육 현실을 생각하면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의 생명력으로 피는 꽃이지 참된 교육의 토양에서 행복하게, 보다 자유롭게 피어나는 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에서 고교생까지 한 달에 수십 명씩 자살하는 현실이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내 눈에 비친 선배 동료 교사들은 어땠던가. 한심한, 놀라운 폭력 교사는 논외로 하자. 좋은 사람도 있고 속 깊은 품성의 사람도 당연히 있었지만 그들도 대체로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역사의식도 없어 보였고, 인간의 교사, 민족의 교사,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마땅한 교사로서의 자긍심도 전망도 없어 보였다. 무사안일, 무기력, 체질화된 것 같은 상명하복……, 그랬기에 전교협, 전교조가 횃불을 든 교사 교육운동의 큰 물결 속에서 그 선생님들의 상당수가 오래고 오랜 모종의 ‘감옥’을 부수며 깨어나는 모습은 나로선 참으로 놀랍고도 감동스러운 것이었다. 

     

1989년 5월부터 정부가 ‘주동자’는 물론 전교조에 가입하는 교사는 모두 중징계를 하겠다는 경고를 거듭하는 와중에 우리 학교에서도 7월 초 전교조 분회가 결성되었었다. 같은 학교 4명의 동료 교사와 함께 내가 해임 처분을 받은 것은 7월 말경이니까 그때까지, 아니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학교는 그야말로 ‘폭풍의 언덕’과도 같았다. 전교조 조합원은 무조건 해임 혹은 파면한다는 정부의 전례 없는 강공책은 전교조를 지지하고 또 함께 해 온 수많은 교사들을 고통과 혼란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해직 대열에 동참할 것인가, 학교에 남을 것인가. 학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교사들이 어떻게든 학교를 떠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그 선생님들이 정부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소망이었다. 


우리 학교 20명 가까운 분회원들이 교내 음악실에선가 둘러앉아 학교에 남을 것인가, 해직 대열에 동참할 것인가를 놓고 돌아가며 자기 발언을 하던 장면이 아프게 떠오른다. 마음에도 없는 탈퇴 각서! 그러나 굴복을 강요하는 각서! 양심의 문제가 거짓 각서를 쓰는 선생님들의 심장을 후벼 팠다. 각서를 쓴다면 학생들은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학교에서는 존경하던 교사가 고심 끝에 탈퇴각서를 썼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에게 실망한 학생들이 그의 수업을 거부한 일까지 있었다지만 우리 학교에는 그런 일은 없었다. 아, 전교조 ‘사태’ 속에서 전교조 교사들을 지키려는 학생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그 얼마이던가. 그럼에도 학생들은 늘 어른들보다 관대했고, 실망과 혼란 속에서도 속마음의 진실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았다.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4년 8개월의 해직 기간 나는 달리 직장을 얻거나 돈벌이는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전교조 상근자’로 살았다. 정책실장, 기획부장, 사무국장 등을 맡기도 했지만 부산 교사 신문 편집 책임자로 일할 때가 가장 많았고 그 일이 내겐 가장 애정이 가고 보람을 느낀 분야였다. 틈틈이 글도 쓰고 그것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1994년 3월 중앙여고로 복직했고 2019년 8월 말 해강고등학교에서 정년을 맞았다.      

1989년 봄과 여름의 전교조—전무후무할 역사적 사건으로서 1500여 교사의 해직 사태 속의 나는 누구였던가.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그땐 그래야 마땅했고 달리 피할 수도 피할 생각도 없었다고. 나중에야 낡아지기도 하고 비틀거리기도 한 것이지만 그때 그 청춘의 사랑은 그랬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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