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60년생으로 1980년 부산 교육대학에 입학하여 82년에 졸업했다. 광주 5.18의 진실과 황석영의 < 죽음을 넘어 시대를 넘어 >는 개인적인 삶을 살았던 교대생을 의식화 교사로 만들고 교육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게 하였다.
1982년 3월 부산 동일초등학교로 첫 발령이 났다. 아이들은 나를 잘 따라 주었고 학부모님들도 나를 신뢰했다. 가난한 산동네 학교라 촌지 문제는 심각하지 않았어도 다달이 촌지를 챙기는 선생님은 계셨다. 학교의 공적인 문제가 생기면 교무실 회의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시정 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분명히 미운 오리 새끼였고 관리 대상이었다.
1985년 즈음에 부산 YMCA 교사 모임과 연결이 되었다. 초등교사는 거의 나 혼자여서 주눅이 들기도 했고 몇 분이라도 모이는 중등 모임이 부러웠다.
1986년 5월 10일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 중심으로 교육민주화 선언이 있었는데 초등교사인 나는 옆에서 지켜만 봐야 했다. 초등의 상황은 열악했고 손잡고 함께 할 교사가 없었다.
1987년 9월 26일 민주교육 추진 부산 교사 협의회에 초등 이병우 선생님을 6인 공동대표로 추대하여 함께 활동했다. 동기 이병우 선생님은 나에게 큰 힘이 되는 동지였다.
1989년 3월 25일 부산 초등교사 협의회를 결성하여 선배 김영주 선생님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활동하는 교사가 몇 분밖에 없었어도 중등에 발맞춰 조직을 꾸린 것은 큰 성과였다.
1989년 5월 13일 부산교대에서 교원노조 결성 준비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나는 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 하나로 경고장을 받으라고 강요당했고 이것을 수취 거부했다.
1989년 5월 28일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6월 10일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부산지부가 엄청난 탄압을 뚫고 깃발을 세웠다. 가슴이 벅찼다.
6월 13일 아침 자습 시간에 ‘남 누리 북 누리’ 노래를 아이들과 불렀는데 순시하던 교장이 보았다. 교장은 의식화 노래를 가르친다고 난리를 쳤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6월 18일 교장은 지난해 나와 같은 학년을 맡은 선생님 몇 분을 불러 놓고 우리 반 학생 명부를 내놓으며, 증인 서줄 학부형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학부형 6명을 골라 학교 앞 다방에 불러 진성서를 작성하여 교육위원회에 보고를 했다.
6월 19일 장학사가 나와서 1차 문답서를 받아 갔다. 이날 장학사는 하굣길 우리 반 2학년 아이들 가방을 뒤져 공책을 가져가기도 했다.
6월 21일 장학사는 노조와 의식화 노래에 관련된 추가 문답서를 받아 갔다.
6월 22일은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부산지부 동삼분회를 결성하기로 한 날이었다. 교장은 분회 결성을 눈치챘고 긴급 종례를 소집했다. 좀 앞당겨 분회 결성을 선포했고 이성을 잃은 교장은 나를 교단에서 끌어 밀치고 오른쪽 빰을 때렸다. 그리고 두 여선생님의 어깨를 붙잡고 끌고 나갔다. 내 몸에는 푸른 멍이 들었고 옷이 뜯어지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장학사들은 새벽 1시까지 동삼분회 선생님들을 붙잡고 다그쳐서 각서를 받아냈다.
6월 23일 부산교대에서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부산지부 초등지회가 결성되었다. 해직과 구속이 분명했지만 망설임 없이 초등지회장을 수락했다.
6월 24, 25일은 전남대학교를 포위한 경찰을 따돌리고 전국 대의원 대회에 참석했다.
6월 26일 교장은 전교 조례에서 나의 담임직을 해제한다고 공식 발표를 했다. 2교시가 되자 교장은 직위해제 발령서를 아이들 보는 앞에서 전달하며 담임이 바뀐다고 말했다. 의식화 노래 건으로 학부모 두 분이 수업 참관을 하고 있었으나 아이들을 보고 흐르는 눈물은 감출 수 없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장학사는 상주하면서 면담을 요청했고 교장은 형사 5명을 불러서 양호실에 대기 시켜 두었다. 저녁이 되어서 분회 결성 시 교장의 폭언과 폭행을 항의하는 농성을 교무실에서 했다. 동삼분회 선생님들과 응원을 오신 중등 선생님들이 계셨고 영상 촬영 팀이 우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저녁 7시 10분경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 빨리 영안실로 오라는 전화가 교무실로 왔다. 아버지께서 교장에게 항의하러 가셨다가 나를 빨갱이라 해서 목을 매셨다는 소식을 농성장에 계셨던 선생님들께 알렸다. 순식간에 농성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담담했고 울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는 시민사회장으로 5일간 치러졌고 매스컴에서도 떠들썩했다. 그때 사전 구속 영장이 발부된 상태여서 장례식장에 오래 있지 못했다. 아버지를 장지에 묻고 나서도 사람들 틈에 숨어 옷을 갈아입고 형사들을 피해야 했다. 그 후 혼자서 넉 달 정도 도피 생활을 했다. 10월 말경 동삼분회 선생님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내가 가면 구속할 거라는 정보를 듣고도 참석했다. 도피보다 차라리 구속되어 감옥에서 살다 나오면 일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구속된 날 어머니께서는 부산대학교 집회에 가셔서 뜨끈한 어묵탕을 만들어 선생님들께 나누어 주고 계셨다. 나는 부산 구치소에서 백일 정도 수감 생활을 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결정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뿐이다.
나의 1989년, 그것은 운명이었다.
* 이 글을 쓴 이성림 선생은 2022년 현재 진해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직의 끝자락을 맞이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