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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Dec 17. 2021

아버지와 우리 반 연정이

나의 1989년 봄과 여름 

1989년 1학년 담임이었던 나는 여름 방학을 앞두고 직위해제되었다. 직위해제가 되면 학교에 갈 수 없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하는 심정으로 전날과 다름없이 출근했다. 중앙현관에 교감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교실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막아섰다. 


1학년 아이들이 학교 입학을 하고 처음 맞는 방학이라 일러두고 싶은 것이 많았다. 잠시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과 인사만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단호한 교감 선생님의 가림막에 막혀 결국 교문을 나서야 했다. 


이 시간이면 늘 아이들과 함께 있었는데 갈 곳이 없었다. 끈 떨어진 연 마냥 자유로웠지만 나는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평소 퇴근길을 아침에 걷다 보니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지금 우리 반 아이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 이 상황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시는 우리 반 아이들을 만날 수 없는 것인가? 몇 차례 징계위원회 절차가 이런 결과로 다가오는 것이 도통 실감 나지 않았다. 

     

전교조가 창립되고 조합원 가입 명단이 발표되었다. 정부와 문교부는 전교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탈퇴하지 않으면 징계하겠다고 했다. 


어느 날 교장실에 불려 갔다. 교장실 문을 여는 순간 숨이 멎는 것 알았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아버지와 경남 산청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오빠, 아침 출근 때까지 우리 학교에 오겠다는 말 한마디 없었던 같이 사는 언니까지 와 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내가 탈퇴 의사를 밝히지 않으니 교장, 교감 선생님은 가족을 불렀다. 고향 거창에서 몇 차례 차를 갈아타고 부산 학교까지 오셨을 아버지를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옳은 길을 가는 것이니 분명히 내 뜻을 밝혀야 했다. 고개를 떨궈 가족들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잠깐 고개를 드는 순간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이미 많이 늙으신 아버지의 눈빛은 노여움과 허탈함, 분노와 배신감, 안타까움과 당혹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적이 좋으면 아버지는 나를 무척 자랑스러워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고 모범생으로 지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발령을 받았는데 전교조에 가입하여 탈퇴하지 않으면 해직이 된다고 하니 아버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거운 교장실에서 고성과 설득이 오가며 시간이 한없이 흘렀다. 그러면 탈퇴한다고만 하고 활동은 하라고 했다. 나는 그럼 그러겠다고 했다. 가족들을 빨리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 탈퇴각서 종이 한 장이 나의 온 삶을 지배했다. 내 정체성을 부정한 것이다. 그 자리를 버틸 자신이 없었던 나를 한없이 책망했다. 나는 한없이 쪼그라들어 땅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신념을 지키지 못했으니 교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한 말을 책임지지 못하고 일상을 산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그런 순간에 가볍게 바뀌는 내 태도를 내가 믿을 수 없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족쇄가 되었다. 


보름 정도 시간이 지나 지부 사무실에 갔다. 온갖 어려움에도 의연하게 견디고 먼저 해직된 동료들이 있었다. 못난 채로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탈퇴각서를 철회하겠다고 했다. 부산방송국에서 취재를 왔다. 뉴스 한 장면으로 나왔다. 그 후 부산일보 강당에서 다시 내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결국 해직이 되었다. 나는 해직자로서 바쁘게 생활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가족들에 대한 부담을 들어내려 했다. 아버지는 고향 집에서 멀리 떨어진 거창 읍내 길에서 쓰러졌다. 자식 앞길을 당신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술로 지내셨다. 아버지의 자랑이었던 딸이 정부에서 하지 말라는 길로 가겠다는 것을 어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당신 마음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부족한 딸만 남아 있다. 서로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이야기라도 도란도란 나누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시간을 가지지 못한 것이 내내 한이 된다.   

  

해직과 함께 방학이 되었다. 해직자로서 거리 선전작업, 집회 참석으로 나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근처로 거리 선전을 나갔다. 한 여자아이가 “선생님”하고 불렀다. 연정이는 “선생님, 왜 학교에 안 와요? 언제 올 거예요?” 하면서 울먹였다. 너무나 뜻밖의 상황이었다. “곧 보러 갈게”라는 말을 할 수 없음이 서러웠다. 나는 이제 거리의 교사인 해직 교사이다. 내 자리가 없다. 아이들이 기다리는 교실로 돌아갈 수 없다. 1학년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도 없었다. 


하루 이틀 선생님이 오기를 기다렸을 아이들이 생각났다. 차라리 아이들을 잊고 싶은 순간이다. 그런데 연정이가 나를 불렀다. 그리움이 밀려왔다, 아이들이 떠 올랐다. 아이들 곁에 있고 싶었다. 얼마나 자랐을까? 한글은 다 익혔을까? 지금은 누가 우리 반 아이들을 돌보고 있을까? 율동을 거의 하지 않던 현기는 지금은 하고 있을까? 명동국민학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해직 소식을 듣고 전년 부모들한테 연락이 왔다. 1988년 9월에 명동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아 4학년 담임을 했다. 그들은 학교에 횡횡하는 소문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빨갱이 교사인 나를 만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왜 빨갱이로 낙인찍혔는지 모른다.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선배 교사에게 열심히 배웠다. 글쓰기 모임, 학급 운영 모임에 가입했다. 그리고 교사의 자주적인 활동을 위한 노동조합에 찬성했다. 이것이 교직 경력 1년 1개월밖에 안 된 교사가 빨갱이 교사가 된 사연이다. 


부모들은 내가 아이들을 어떻게 만났는지 잘 알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나의 길을 응원해 주었다. 이제 나의 첫 제자들이 마흔을 넘겼다. 4학년 담임을 하면서 문집을 만들려고 아이들 글을 모아 두었는데 만들지 못했다. 문집을 만들어 그 제자들을 만나고 싶다.     


* 이 글을 쓴 백점단 선생은 현재 부산의 한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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