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부산사대 국어교육학과에 들어가 1984년 3월 동삼여중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대학 다닐 땐 가톨릭 학생회에 가입, 젊은 예수 운동에 참여했다. 그 서클에서 시대의 의미를 먼저 읽는, 성경의 예언자들에 대한 발제를 대표로 한 적이 있고, 파울로 프레이리 책을 읽은 적도 있다. 부산 가톨릭 센터에서 열린 5.18 사진전을 관람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 교단에 섰을 때 놀라웠던 것은 학교가 상식이 잘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개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교였는데, 교장은 정말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이었다. 선배 교사들 중에는 꼰대들도 많았다. 학생들에게 강제로 폐지 모으기 경쟁을 시키는 것도 이상했고 여교사들에게 순번 매겨 커피 타게 하는 것도 이상했다. 아이들 학생증에 필요한 사진 값을 1000원 받아서는 사진관에는 700원만 주는 것도 그랬다. 그런 소소한 것들이 내겐 다 문제가 되었다. 교장은 여교사에게 바지를 입고 다니지 말라고까지 했는데, 나는 그걸 따를 수는 없었다. 부러 바지를 입고 다녔다. 첫 학교에서 다른 학교를 옮겨 갔을 땐 빨갱이 교사가 온다며 교장·교감을 중심으로 대책회의까지 했다는 사실을 1년이 지나서야 어떤 선생님이 말해 줘서 알았다.
1985년에서 87년 경까지 낮에는 학교에서 일하고 밤에는 김영수 목사님과 연결 되어 있는 야학에서 교사를 했다. 생활 야학이었는데 나는 한문을 가르쳤다. 87년 여름 부산교협 창립 준비위원회 모임이 있던 망미성당 로사회관에는 가지 않았지만 가을에 부산교협이 창립되는 날에는 내게도 발언 기회가 주어졌었다. 나를 교협으로 이끈 사람은 첫 학교에서 만난, 부산 Y-교사회와도 연결된 박진주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이 우리학교 소모임 회장을 했다.
1989년 초 교협이 전교조로 전환하기로 결정이 난 후부터 정부 당국은 끊임없이 노조는 안 된다며 우리를 공격했었다. 징계위협도 계속되었다. 전교조가 결성되기 한 달 보름 전 쯤 부산교협의 일흔 명 가까운 교사들이 양산 배내골로 달려가 밤새 술 마시고 토론도 하고 그랬는데, 그 자리는 사전 해직 결의 대회의 자리가 되었었다. 나는 거기에는 가지 않았다. 전교조 결성 준비를 위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전교조 결성 전에도 후에도 나는 회의를 엄청나게 많이, 열성적으로 다녔다. 전국 단위의 회의에서 소모임, 분회 모임까지. 그것은 전교조라는 조직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현장 교사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책실장으로서 늘 현장을 돌아보고 부산지부 사업계획서를 기획했다.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지려고 노력했고, 하부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고 고심했다. 그렇게 89년 한 해를 보내고 나니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힘이 들었다. 그러나 누구랑도 내 힘든 걸 나눠 가질 수는 없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직된 후 한 달 활동비로 받은 30만원 중 5만원만 쓰고도 나름 씩씩하게 일했다. 하루 두 끼만 먹고 돈이 없으면 걸어 다녔다. 다만 다른 해직 선생님들이 힘들어하는 건 보기가 안쓰러웠다. 돌아보면 89년 한 해는 정신없이 바빴다는 생각부터 먼저 든다.
1990년 서부 지회 공립지구 사무장으로 갔을 때는 본부에서 내려온 사업 중에서 분회 단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그것은 주로 해직교사들 교사들이 현직교사들의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추어 전교조 관련 홍보물을 배포하고 전교조 신문이나 부산지부 신문을 가지고 일선 학교를 방문하여 선생님들에게 전하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하면서야 나는 숨을 좀 돌릴 수 있었다.
우리 집안은 유복한 편으로 나는 1남 4녀 중 3녀였다. 그런데 바로 위의 언니도 교사로서 전교조 활동을 했고 결국 해직이 되었다. 남동생은 부산사대 학생장으로서 학생운동을 했고 1989년엔 전교조 지키기 운동에 앞장섰다. 그래서 집안에서 큰 갈등은 없었다. 어머니는 언니에게 “니 의지대로 살아라” 하시며 탈퇴 각서를 요구하지 않으셨다는 말을 언니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전교조 교사들이 교육청에 가서 싸울 때 함께 하시기도 했다.
전교조 결성일 전 며칠 전에 장장 29시간 동안 진행된 전국 회의에 참석했던 때가 떠오른다. 대전이었을 것이다. 결성 일을 뒤로 미루어야 하느냐 마느냐가 가장 중요한 의제였는데 참석한 선생님들 모두가 꼿꼿이 앉아 진지하게 회의에 임하는 그 모습에서 내가 엄숙한 역사의 순간을 함께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내 마음도 숙연해졌었다.
해직되기 전부터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출근 투쟁은 못했다.
영화 <모든 타임즈>를 보면 어수룩한 노동자 챨리 채플린이 어찌저찌 떠밀리다 보니 노동자 시위대의 맨 앞줄에 서게 되어 구호도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1989년 전후한 당시 늘 맨 앞자리에 서 있었던 나를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장면이다.
복직은 동명여중으로 했는데 그 이후로는 전교조에서 분회장 이상의 직책을 맡은 적은 없다. 사는 게 좀 힘들어서 심리학 석사 과정 공부를 했다. 금사중학교라는 학교에 갔을 때 아이들과 소통이 잘 안 되어 고심 끝에 상담 연수를 갔는데 그게 너무 좋았다. 그래서 심리학 공부를 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상담 전문 강사로서 부산의 학교 400여 곳에서 교사 대상 상담 연수를 했다. 전교조 부산지부 참교육실천위원회에서 개설한 상담 연수에도 강사로 나갔음은 물론이다.
1989년의 역사의 의미를 묻는다면 그 투쟁으로 참교육 실현의 교두보가 마련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을 위해 꼭 1500명이 해직되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1989년 전교조라는 생명체가 참교육 실현이라는 자식을 낳았다. 그런데 자식을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낳고 나면 그 자식은 스스로 자라야 한다. 전교조는 항상 참교육 실현이라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기 전에 보고 싶은 것은 조국의 통일이다.
* 이 글의 주인공 조상희 선생은 명예퇴임을 한 후에도 청소년과 교사 대상 상담 관련을 일을 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