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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Jun 05. 2020

이 '독사'는 어찌할 것인가

야샤르 케말의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문학과 지성사)를 읽고 

'복수'라 하면 중국 무협지나 아메리카 서부 활극, 혹은 마피아들의 세계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일부 이슬람 문화권에 지금도 남아 있는 이른바 '명예죄' 혹은 '피의 복수'의 관습은 확실히 낯설다. 아니 그것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실증법이 눈을 뜨고 살아 있는 이 대명천지에 피의 복수가 있을 법이나 한 일인가?


그러나 터키가 낳은 세계적 작가 야샤르 케말은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를 통해 그 '피의 복수'의 터키적 전통(!)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마땅히도 그것을 고발한다.


에스메라는 한 아리따운 처녀를 '끔찍이' 사랑한 할릴이라는 사내는 몇 번에 걸친 구애와 청혼이 거절당하자 '어느 날 작업에 들어'간다. 6명의 장정을 동원해 에스메를 '납치'하고 '겁탈'하고는 '시청으로 달려가 법적인 절차를 밟고 혼인신고'까지 해버리는 것이다. 에스메는 야반도주도 시도하고 침묵으로 저항도 하지만 결국 모든 걸 포기한다. 그러한 폭력적 혼인-납치혼(拉致婚)을 완강하게 용인해온 묵은 관습 앞에 그녀는 무력할 뿐이었고 때가 되어 태어난 아들 하산이 그녀에게 그나마 삶의 즐거움과 희망을 심어준 것이다. 


하지만 에스메의 운명은 그녀의 연인이었던 압바스가 출옥하면서 급변한다. 에스메의 사랑을 확인한 압바스는 할릴에게 총을 쏴 복수하고 그 역시 죽음을 맞이하지만 할릴의 가족과 친지들에게는 원인 제공자인 에스메가 바로 살인자이며 피의 보복을 받아 마땅한 악녀다. 그들에게는 애초 할릴이 에스메에게 가한 폭력들, 즉 납치, 아편을 먹이면서까지 행한 겁탈, 그리고 강제 결혼은 어떤 고려의 가치도 없다. 살인을 한 당사자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 아니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렇게 으르렁댄다. 


남편을 죽인 '독사'는 죽어야만 한다! 

가족 중 누군가가 나서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한다! 

억울하게 죽은 할릴은 저승으로도 가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악착같이 피의 복수를 부르짖는 사람은 '아들' 할릴을 잃은, 에스메의 시어머니인 어린 하산의 할머니다. 또한 집단 광기에라도 사로잡힌 듯한 마을 사람들의 오도된 증오심은 세월과 함께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증폭된다. 에스메가 자살을 하거나 마을을 떠나버렸더라면 만사는 휴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나마 이성을 잃지 않으려는, 하산의 삼촌들 중 하나는 그의 '아름다운 형수'에게 마을을 떠나달라고 하소연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된다고. '형수는 죄가 없지만 죽어야 한다'고. 그러나 에스메는 아들 하산을 두고 가라는 데에는 결단코 동의할 수가 없다. 


결국, 할릴의 두 동생들이 사건이 있은 지 몇 년이 지나도록 복수를 결단하지 못하고 그 어머니가 거금을 들여 살인을 청부한 사람들조차도 에스메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대리 복수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자 열 두어 살 어린 하산이 '아비의 원수를 갚아야하는' 유일한 존재로 떠오른다. 그리하여 하산은 끝내 삼촌이 사준 총으로 반미치광이가 된 상태에서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자 '창녀'인 제 어미를 살해한다. 


더 끔찍한 것은 어린 하산이 미쳐가는 과정이다. 할머니와 동네 사람들이 집요하게, 그저 꾸며낸 이야기임에도 확신을 가지고, 오직 제 어미를 사랑할 뿐인 하산을 다그치며 이렇듯 아주 세뇌를 시키는 것이다. 


 "네 아버지는 저승에도 가지 못하고 귀신이 되어 이 마을을 떠돌고 있다. 우리에게 나타날 때마다 울며불며 복수를 애원했다. 봐라. 저 구렁이가 바로 네 아버지다. 저 뱀이 바로 네 아버지다! 아버지를 저런 꼴로 살게 내버려 둘 참이냐…?" 


하산은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제비집의 제비새끼들을 깡그리 죽이는 행위를 통해 저항도 하고 그러한 미신 즉 미혹한 신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수렁으로 빠져들기만 한다. 마을 사람들로부터는 철저하게 외면당한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에겐 '귀가 아프게' 들려오는 마을 사람들의 소리가 있다. 


'아버지는 귀신이 되었다. 엄마는 창녀다, 하산이 드디어 미쳤다.' 과연 하산은 '수백만 마리의 구렁이와 함께 소복을 입고' 나타난 아버지 귀신을 직접 면대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 아버지조차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하산아, 너는 내 아들 하산 아니냐! 내 핏줄이 아니냐! 아버지를 좀 구해주렴. 내 앞에 있는 구렁이들이 그냥 구렁이가 아니야. 다 한이 맺혀 죽은 사람들이야! 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지만 그 원수를 갚지 못해서 한이 맺혀 죽은 사람들이라고! (…) 내가 불쌍하지도 않니? 하산아, 얘야. 제발 이 지옥에서 날 좀 구해줘. 구렁이를 좀 없애달라고!"




야샤르 케말이 던지는 질문과 그 대답은 명백하다. 작품 속에는 한번도 직접 등장하지 않는 '독사'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피의 복수'라는 관습 내지 전통 혹은 집단 광기다. 가부장적 전통의 폭력성이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바로 그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 우리는 도대체 누굴 죽이고 만 것인가라고. 


독사로 몰려 결국 죽임을 당한, 아니 저 '독사'에게 살해당한 에스메는 누구인가? 독사에게 몰려서 제 어미를 죽이게 되는 하산은 또 누구인가? 그들은 두말 할 나위 없이 독사의 희생자들이다. 심지어 저 일련의 비극과 광기를 불러온 최초의 장본인인 할릴조차도 어떤 면에서는 피해자라 할 수 있다. 그 역시 어린시절부터 혈통과 가문의 명예에 대한 남성 중심적인 맹신과 비인간적인 가부장적 폭력의 학습으로부터 자유로울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나마 우리에게 일말의 위안을 주는 것은 제 아무리 집단적 광기와 폭력의 지배가 일종의 자연처럼 절대적이 되었다 하더라도 생명과 사랑의 이름으로 그런 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혹은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방황하는 하산에게 "케림 아저씨 말만 믿고 네 아버지가 유령이 되었다고 해서, 네 엄마를 해치는 그런 일은 하지 말거라. (…) 네 엄마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야. 알라의 애인이다. 그런 사람을 해치는 날에는 알라께서 온 마을에 벌을 내리고 말 거다"라며 빙그레 웃는 두루순 할아버지도 있고, "남의 장단에 맞춰 춤추느라고 엄마를 죽이면 안 된다"는 쿠르드 족 식당 주인아저씨도 있다. 


아니 그 이전에 어린 하산 자신부터 그러한 풍습의 모순과 폭력성을 온몸으로, 본능적으로 거부코자 했다. 어미 살해의 강요로부터 벗어나려 백방으로 몸부림도 쳤다. 그러나 하산이 사랑하는 엄마가 아니라, 정녕 죽이고 싶었던 그 '독사', 천년도 더 묵은 역사를 가진 그 독사, 모두가 일어나 죽였어야 했던 그 독사가 오히려 하산을, 에스메를, 끝내 마을 동체 전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독사…>가 내뿜는 무서우리만치 강력한 리얼리즘은 필경 야샤르 케말 자신의 생애와 깊은 관련이 있다. 연보에 따르면 1922년 터키 남부 지역 태생인 야샤르 케말의 아버지는 다른 집안과의 피의 복수에 연루되어 살해되고 그때 그는 한쪽 눈을 잃는다. 소설 속 하산과 마찬가지로 케말의 나이 6살 때의 일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신념, 즉 공산당, 민주주의, 노동 운동 등을 이유로 정권 측으로부터 끊임없이 탄압 받고 투옥되고 고문도 견뎌야 했던 반체제 지식인의 삶을 포기하지 않아 왔다. 그리고 그가 하산의 직접적인 모델이 되는, 제 어머니를 죽인 열 두어 살 난 아이를 만나게 된 것도 감옥에서였다. 


야샤르 케말의 시선이 언제나 터키 내 쿠르드 족을 비롯한 소수 민족, 도시 빈민, 여성 등 소외된 사람들에게 향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그의 '독사'가 이슬람 세계의 청산되어야 할 구습만을 의미하지 않고 온갖 형태의 사회적 억압과 불평등, 제국주의의 문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유형무형의 폭력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해보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닐 듯하다. 요컨대 이 독사든 저 독사든 우리가 죽였어야 마땅한 독사들은 어쩌면 오늘도 다시금 고개를 쳐들고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지는 않은지? 


정작 죽였어야 할 독사는 내가 아니라 너희들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독사가 아닌가? 그 독사를 죽이지 않는 한 독사는 너희들의 이기와 무지몽매와 무한 욕망이라는 자궁에서 언제라도 새로 잉태되고 자라고 급기야는 너희들의 목을 물어뜯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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