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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Jun 05. 2020

청빈은 가능한가?

'부자 되세요' 덕담 앞에 도전받는 청빈의  삶과 철학

 탕진의 능력은 위대한 족속의 특권이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위대’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나 같은 소시민의 ‘탕진 능력’을 돌아보면 그건 금방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만 들어서도 숨이 막힌다. 네 벽을 빽빽이 채운 영화들은 우선 그 수량에서 나를 압도한다. 내가 뷔페를 좋아하지 않는 까닭도 그렇다. 화려하게 진열된 산더미 음식들은 오히려 내 식욕의 기를 꺾어 놓는다. 또 있다. 대형 마트나 백화점엘 가면 머리부터 빙글빙글 도는 걸 나는 어찌할 수가 없다. 요컨대 나는 아낌없이 탕진되고자 하는 물질의 공세 앞에서 형편없는 내 소비력뿐 아니라 내 왜소한 욕망의 그릇만 번번이 확인하게 된다고 할까? 아니 그보다는 철학의 빈곤을 절감한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소박하게 말해 갈수록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는 뜻이다. 


탕진의 능력은 애초부터 없고 그렇다고 세상과 담을 쌓고 안빈낙도의 삶을 살아갈 내공도 자신도 없는 내게 저 ‘결연한 자본주의’로서의 신자유주의의 얼굴은 문득문득 공포로 다가오곤 한다. 무한 경쟁과 무한 욕망이 뒤섞여 용트림을 하는 그 얼굴엔 삶의 주체로서 존귀해야 할 인간이 잘 안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내가 딴은 생뚱맞게도 이렇게 묻고 싶어지는 것은. 우리 시대, 청빈은 가능한가? ‘부자 되세요’라는 뻔뻔스러운 광고 카피가 수 백 년 전통의 덕담인 ‘복 많이 받으세요’를 하루아침에 추문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시대, 빈익빈 부익부의 골이 갈수록 깊어 가는 이른바 양극화의 시대에 청빈은 과연 무엇인가? 


 청빈이 그 자체로 ‘오래된 미래’의 소중한 인간적 가치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난(貧)을 감수하더라도 깨끗(淸)하게 살아야 한다는 양심의 명령도 그러려니와 가난의 친구로서의 마음의 청정함은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금강의 지혜로 빛날 터다.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강요된 절대 빈곤은 마땅히 해결해야 할, 우리 모두의 시급한 사회적 과제다. 이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그와 함께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지 않을까. 그것은 청빈이 도전받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청빈이 외롭지 않았던 시대가 어디 있었겠는가? 하지만 청빈을 위협하는 적들이 오늘날처럼 다양하고 교묘하고 악착같은 시절은 없지 않았을까? 시체 말로 돈이 안 되는 것은 도무지 존재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이 세상은 노골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소유 욕망을 부채질하는 온갖 기획과 상품들로 넘쳐나고 있다. 물질 상품만이 아니다. 고가에 고급임을 내세우는 정신 상품도 즐비하다. 교회와 사찰도 사람이 들끓어 재물이 많이 모여야 거룩해 보이고 문학도 철학도 돈이 되어야 제 구실을 하는 것 같다. 이렇듯 오늘의 청빈은 옛 청빈에 비해 사면초가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래도 옛 청빈은 어쨌든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의 청빈은 웃음거리가 안 되면 다행인 처지다. 


물론 청빈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도덕적 결단의 소산이다. 청빈을 실천하는 이는 세상 탓이나 하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그는 물질적 가난의 불편함을 수행의 가슴 벅찬 방편으로 삼음으로써 정신의 텅 빈 충만과 행복을 구현한다. 그의 충만과 행복은  자신의 삶에서 나오는 것일 뿐 남의 시선이나 사회적 인정으로부터 매우 자유롭기에 아름답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청빈의 사회적 조건을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청빈을 선택할 자유뿐 아니라 청빈의 권리도 누릴 수 있어야겠기에. 청빈의 조건은 무엇인가? 대답은 자명하다. 그것은 청빈이 가능한 사회, 청빈의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이웃의 생존의 권리에도 정성껏 관심을 기울이는 일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말할 필요도 없는 바지만 생존이 있어야 청빈도 있는 법이다. 가까이로는 부산 지하철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과 케이티엑스 여자 승무원 노동자들이 생존 투쟁을 위해 거리로 나선 지 오래다. 그들은 청빈의 권리를 원천적으로 빼앗긴 셈인 것이다. 양극화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수많은 사회적 약자, 농산물 개방으로 생존의 벼랑으로 몰린 농민, 도시 빈민, 외국인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다시 한번 묻기로 하자. 청빈은 가능한가? 나는, 차마,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우리가 청빈을 푯대 삼고, 만인의 청빈의 권리를 옹호하며, 청빈의 조건을 위해 공동 분투할 수 있는 한, 청빈의 순수 가치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날 것이라고. 


* 사진은 사진작가 이상석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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