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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형 Sep 06. 2023

'검은 점'들이 '흰 점 꽃'으로
피어날 때까지

‘검은 점’이라 했다.


서이초등학교의 젊디 젊은 선생님의 죽음 이후 검은색 옷을 입고 거리로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교사들 하나하나에 붙여진 이름. 검은 ‘점’.


어제 부산시 교육청사에 모인 2600여 ‘검은 점’들 앞에서 사회자로 마이크를 잡은 역시 젊디 젊은 교사는 “(이렇게 소중한) ‘점’들이 모여 (거대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물결’을 이루었다”고도 말했다.


어제 집회의 거의 대부분은 ‘검은 점’들이 자신의 아픈 사연, 슬픈 사연, 답답한 사연, 놀라운 사연, 억장이 무너지는 사연을 토로하면 땅바닥에 정연하게 앉은 수천의 검은 점들은 그것을 경청하고 눈물로 공감하고 때론 함께 분노도 하는 시간에 바쳐졌다.


그런데 그 숱한 사연의 무대로는 주역이랄까 악당이랄까 악귀랄까 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것은 세 부류였다.


그 첫 번째는 악성 민원인으로서 ‘갑질 학부모’. 내가 보기에 그들은 정신과 치료가 요구되는, 과대망상이거나 폭력이 내면화된 부모였다. (지난 8월 각종 방송에서도 보도된 바 담임에게 자기 애는 ‘왕의 디엔에이’를 가졌으니 ‘왕자에게 말하듯이 (하라)’ 어쩌고 했다는 부모를 우리가 어떻게 정상적이라 할 수 있을까?)


 
두 번째는 일선 학교의 교장, 교감으로서 그들은 학교 책임자로서의 자질이나 소신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교육자로서의 자긍심도 찾아보기 힘든 그런 사람들.    


마지막으로는 허우대만 멀쩡할 뿐 빈 깡통인, 소위 '영혼 없는' 관료들의 철옹성으로서의 교육청과 교육부가 있었다. (오, 교육청과 교육부가 앞장서서 학교라는 교육 공간과 가장 소중한 교육 주체로서의 교사들을 무례하고 폭력적으로 침범하는 자들로부터 지켜주리라 한때나마 기대했을 ‘검은 점’들이 결국 맞닥뜨리게 된 실망, 좌절, 두려움, 절망, 분노를 생각하면 학교 밖의 나조차 서늘하게 무서워진다.)


어제 49재까지 이어진 여덟 차례의 대규모 교사 집회 현장에서 터져 나온 '검은 점'들의 절절한 목소리들을 떠올려 본다. 그중 맨 앞엣것은 아무래도 서이초 선생님뿐 아니라 그간 숱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생님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 촉구다. 마땅한 일이다. 진상규명이 바로 되어야 죽음의 이유와 직간접적인 가해자도 밝혀질 것이고 그것을 토대로 문제의 아동복지법 개정도 제대로 된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입이 닳도록 외친 ‘교사의 생존권, 인권, 권리, 교육권의 보장'이라는 주장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던가. 그것은 신성해야 할 교육 공간으로서 학교를 제멋대로 들락거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침범자로서의 학부모, 교사의 사적 공간인 손전화를 제멋대로 들락거려도 좋다고 착각하는 무뢰한으로서의 학부모, 그 악성 민원의 무법천지로부터 교사를 철저히 보호함으로써 교사와 학부모 간의 정상적인 상담 (오직 학생이 잘 성장하도록 함께 힘을 모으기 위한)이 가능토록 할 제도적 장치 구축의 시급 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갈 길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터다. 그러나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는 분명해지고 있다. 어제도 ‘검은 점’들은 눈물을 참으며 목놓아 외쳤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교사로 살고 싶다!”
       

▲ 고 서이초 교사 49재의 날, 부산시 교육청 앞마당을 가득 메운 '검은 점'들은 교사들의 잇단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즉각적인 '아동복지법 개정'을 요구했다. ⓒ 윤지형


 교사로 살고 싶다는 절규, 그것은 맘껏 교육적 열정을 펼칠 수 있는 그런 교사로 살고 싶다는 것이고, 학창 시절부터 꿈꾸어온 참된 교사로서의 삶,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맘껏 살고 싶다는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 죽지 않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서 다시는 교사의 죽음이라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그런 다짐 아니었을까.    


'우리는 더 이상 죽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검은 점’. 
그 ‘점’에 대해 생각한다. 하나하나의 '점'은 작기에 진실하고 작기에 아름답다. 외롭고 독립적이기에 강력하다. 바로 그런 '점'이기에 오늘과 같은 도도한 물결. 힘찬 파도가 될 수 있었다 할 것이다. 정지용의 시 <고향>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캄캄한 일제 강점기 순정한 시인의 오갈 데 없는 마음은 한 ‘점’의 ‘인정스레’ 핀 흰 꽃에 위안을 얻고 유혹처럼 밀려드는 모종의 절망도 물리칠 수 있었으리라. 


지금은 아프고 막막하고 힘겨운 ‘검은 점’들이 ‘흰 점 꽃’으로 환하게 피어날 날이 어서 꼭, 오기를 소망하고 기도한다. 오늘의 ‘검은 점’들은 우리 교육의 희망이며 우리 아이들의 희망임이 틀림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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