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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우 Dec 12. 2020

시(詩) 읽는 사람들

시(詩) 읽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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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여름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시에서 주관하여 원고가 책이 되는 프로젝트에 선정된 후 여러 협 과정을 거쳐 11월 말 완성된 시집 《싸목싸목 걷는 길》을 직접 만나보니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다가왔다. 나름 신경을 꽤 썼기에 느끼는 감회가 남달랐다. 첫 발표회를 겸한 시 낭독회는 나의 여섯 남매가 모여 김장하는 날이었다. 그 모임은 이미 소개하였던 것처럼 남매들과는 자라면서 공감대가 형성된 부분이 많아 옛 추억을 소환하는 도구로써 소임을 충분히 한 셈이다. 김장하던 날의 모임이 첫 낭독회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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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도움을 주신 분들과 만남이었다. 문대학 전담강사로 프로젝트에 참여하라고 적극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분, 시집 표지와 내지에 실린 그림 사진을 제공해주신 분, 멋진 시집의 탄생을 감수해주신 분 등이다. 이날의 만남은 시내의 조용한 횟집이었는데 운초 화가께서 예고도 하지 않고 꽃다발과 출판을 축하하는 아담한 현수막을 한지에 써오셨다. 꽃다발을 받은 기분이 쑥스러웠으나 감사히 받았고, 준비해오신 멋진 서체의 현수막은 식당 사장님의 양해를 얻어 벽에 붙이고 참석자 넷이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사장님도 왕년에 출간 경력이 있는 분으로 멋지게 사진을 찍어 주셨다. 그리고 참석하신 분들이 차례로 ‘서예’, ‘선암사의 유월’, ‘무소유 길을 걸으며’, ‘가위질’ 등을 차례대로 낭독하였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유쾌한 한때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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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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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도 없는 산길 작은 암자에 올라
운신의 좌표 그려보고 싶을 때
흑백의 세계가 동경이 되어 뭉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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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 고요를 품은 송연(松煙)
조심히 갈아놓고
새로 스쳐 갈 소중한 인연 기다림으로
담백한 만남 떠올리며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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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획의 흔들림이 두려워 호흡이 멎고
초심을 한 자 옮김이
어찌 태산보다 가벼울까
어느덧 공간은 묵향으로 채워지고
저 우주의 명멸하는 별빛 속에서
전설의 위인이 다가와
귓가에 소곤거리는 명언들이
약속한 여백 남기고 자리 잡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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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지만
바람처럼 존재 인식함으로
세상 시간 위 소망하는 사유들을 잊게 한다
잎사귀 떨구어 낸 겨울 나뭇가지 흔들리듯
붓끝에 걸린 떨림이 문득 통쾌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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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문인협회 주관 문대학에서 함께 수학하신 문우 두 분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중에 한 분은 이번 프로젝트에 같이 선정되어 시집을 출간한 분이었다. 그동안 자신의 시집을 출간하지 않았을 뿐 이미 기성 시인이나 진배없는 실력가들로 두 분 모두 시 낭송을 감동적으로 잘하시는 분들이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장소를 옮겨 순천에서 여수로 내려가는 서쪽 길목에 자리한 순천만의 와온 해변의 찻집을 찾아갔다. 시정(詩情) 분위기를 함께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시국 탓인지 일찌감치 영업을 끝내고 불이 꺼졌고 하늘은 보름이 이틀 정도 지난 시점이라 달은 하현을 향해 가있었다. 칠순 훌넘으신 최 시인으로부터 바다 건너 새우양식장과 옛날에 이곳 남정네들 와온 바다 뻘을 헤집고 한 뼘 크기의 솔섬 주막으로 밤 나들이 다녔다는 사연을 들었다. 외부로부터 자연으로 차단된 갯벌 위의 작은 섬이 어쩌면 시절 낭만이었을까. ‘와온의 꿈’과 시간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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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온의 꿈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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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드문 와온 뻘 건너
정령처럼 저녁 햇살 타고 다가오는
코끝 시린 동지섣달 갯바람 무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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잰걸음 열정 내려놓고
땀구멍 닫아버린 침묵하는 태양은
바닷가 나지막한 산마루 걸터앉아
시간 속에 개어 넣고 되새김하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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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심장 열고 스쳐 간 생명들이
남겨놓은 무작위적 발자국 따라 걸으면
어느덧 시작되는 겨울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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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꽃잎들은 깃털이 되어
바람처럼 흔적 없이 흩어지는데
저 앙상한 갈대 줄기에는
작은 소망 하나씩 끈질기게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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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에 내려와 살면서 호형호제하며 가깝게 지내게 된 후배가 세 명 있다. 그중에 두 명을 주말에 만났다. 평소에도 가끔 만나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는 관계로 허물이 없다. 이들은 시집에 등장하는 ‘숨바꼭질’의 주연과 조연자이다. S가 어느 날 주차 중에 차 안에서 우연히 H를 목격하고 그 일을 나에 소상히 밝혔는데 그게 너무도 웃겼다. 한 번은 그 문제의 장소 가까이에서 모인 적이 있어서 현장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었다. 주연 H에게 시집 두 권을 건네주 ‘숨바꼭질’을 낭독하게 했다. 그리고 유쾌한 웃음을 나누었다. 우리인연은 오래오래 그렇게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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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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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이 무료해질 시간을 쫓아
밤이슬이 가로수 잎에 내려앉는 동안
친구는 불 켜진 스마트폰으로 허공에
초승달을 그리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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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아파트 베란다에서
애틋한 눈빛이 반짝거릴 때
저 술래들의 소리 없는 대화가
등나무 아치 그늘 아래 차곡차곡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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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사랑의 훼방꾼이 될 수 없어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불빛만
안타까운 마음으로 붙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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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현재의 직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동안 많은 이들과 어울리며 다양한 사연들을 쌓았다. 당연히 얻은 것도 많고 또 아쉬운 시간도 존재한다. 그래도 감사함이 가슴속 깊이 자리를 하고 있기에 상당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여긴다. 변변치 않은 글일망정 이 공간에 머무는 동안의 사색들이기에 내게는 매우 소중하고 그렇기에 마음속으로 그런 의미를 담아 같은 직장의 우리 직원 백삼십 명에게 한 권씩 전달하였다. 의외의 선물에 놀라는 직원도 있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었다. 이번에 조금 여유 있게 출판을 하였기에 은퇴 후에도 만나는 이들에게 한 권씩 나눠주는 재미로 살아갈 요량이다.
처음에는 인터넷서점에서 본격적인 판매도 고려하여 가격표도 인쇄하였으나 출판사에 책을 맡겨놓고 주변 분들에게 나누고 드리고 있다. 나에게 선물 받은 이들 가운데는 다른 이들에게 선물해도 좋겠다며 두세 권, 혹은 열 권쯤 더 달라는 요청을 한다. 2층에 있는 개발부서 직원이 내년 초에 국비유학을 떠나게 되었다며 《싸목싸목 걷는 길》을 들고 와서 ‘작은 꽃’ 좋던데요 하며 사인을 받아갔다. 나도 그의 유학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나에게 시집은 새로운 대화의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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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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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키가 작니?
나 보며 쉬어 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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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꽃송이도 작니?
더 가까이 다가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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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는 왜 그렇게 강하니?
먼 세상도 향기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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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참 예쁘구나!
예쁜 마음으로 보아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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