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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우 Dec 08. 2020

월동준비는 지붕 잇기와 김장하기(2)

ㅡ 시(詩) 읽는 남매들

월동준비는 지붕 잇기와 김장하기(2)

시(詩) 읽는 남매들
​ ​

음식을 잘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게 정확하다고 장담은 못 하겠으나 살아오면서 요리 솜씨가 좋은 사람에 대하여 느낀 바를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보자면, 첫째 요리하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는 점이고, 둘째로 몇 가지 요리를 동시에 수행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리고 셋째로 제일 중요한 점은 맛이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요리 솜씨가 별로 없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도 음식 맛은 물론이고 몇 가지 요리를 한꺼번에 준비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결혼 초기에 비하면 괄목상대할 정도로 그 음식 솜씨가 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김치찌개가 안 되는 독특한 성향을 지닌 사람이 내 주변에도 있다.


​ ​ 나의 누이들은 다섯 명인데 기본적으로 요리를 잘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큰 누님이 요리하는 속도가 빠르고 맛도 일품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뚝딱하면 완성된다. 올해 처음으로 백양사 인근에서 개최된 김장김치 담그는 행사에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큰 누님만 빠졌다. 친정 오빠 둘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전갈을 받고 서울과 부산, 청주 등지에 사는 여동생들도 매제들을 대동하고 모두 합류했다. 전날부터 미리 도착하여 배추와 무를 뽑아 소금에 절이는 작업을 거들어준 동생도 있었다.

토요일 도착해보니 막둥이(막냇동생은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막둥이'가 더 자연스러운 호칭이었다)가 전날 절여놓은 배추를 물로 헹구고 있었다.

막내도 올해 이미 쉰 살의 중장년이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나이이다. 우리 남매들이 몇십 년 만에 이렇게 함께 모여 김장을 하는 것인지 사실 기억도 안 난다. 맏이와 막내의 나이 차이가 커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시점도 차이가 난다.

그런저런 이유로 부모님 생신 때나 만날 수 있을까 명절에도 누이들은 시댁과 친정의 갈림길에 서 있다 보니 김장을 함께 한다는 것은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기도 했다.


​ ​ 그런데 이번에 김장김치를 담그기 위하여 우리 남매들이 모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둘째 누님의 역할이 컸다. 누이 부부가 몇 해 전 일선에서 퇴직하고 절반의 귀촌이 그것을 가능케 하였다.

12월 초 토요일 오후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본격적으로 김장 담기를 시작하였다. 준비조가 절인 배추를 테이블로 옮겨다 주면 담그는 조는 꼼꼼하게 배추 사이사이에 양념을 바른 다음 김치통에 담고, 뒷줄에서 대기하던 운반조가 김치통 가장자리의 고춧가루를 닦아내고 뚜껑을 닫아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갔다. 여럿이 협동하다 보니 산더미 같았던 배추는 어느새 김치로 변신하여 목적지를 향해 떠나갈 준비상태가 되었다.


한바탕 테이블이며 바닥청소를 하고 주변 정리가 끝나자, 작은 누님이 제법 큰 독에 미리 담근 곡차를 자형이 채로 걸려서 대형 주전자에 옮겨 담아 방으로 들어오셨다.

오늘의 중심 차림은 삼합이다. 수육과 홍어회, 이제 막 담근 김치를 보쌈으로 곡차까지 준비되니 올해도 무난하게 월동준비가 끝났다고 안도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았다.​ ​

분위기가 한 순배 돌아가자 나는 준비해 간 시집 《싸목싸목 걷는 길》을 꺼내어 이 책이 발간된 취지와 경과를 간단히 설명하고 형님께 건배사를 부탁드렸다. 그랬더니 온 가족이 기쁨을 나타내며 박수를 보내주었다. 사실 첫 시집인 《싸목싸목 걷는 길》을 받고 처음으로 그 실체를 가족들에게 공개하는 자리이기에 나 역시도 기분 좋은 자리였다. 건배를 마치자 제일 먼저 작은 누님이 <그리움Ⅱ>를 읽고 싶다고 하여 모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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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Ⅱ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아니

한 번도 보고 싶다고도 말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성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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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헤어지던 날까지

수년간 우리는

천천히 이별을 준비했기에

정작 그날에 이르러 그저 무덤덤했다

​ ​

가끔 먼 길 달려가면

반가움이 식기도 전에

젊은 사람은 활개치고 다녀야 한다며

어서 돌아가라고 손사래 치셨다

​ ​

어느 날 저녁밥을 먹다가

갑자기 가슴 먹먹해지며

눈앞이 흐려져 수저를 내려놓았더니

아내가 의아해했다

어머니가 생각나는 날에

​ ​

​ ​

부모님 생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가슴이 먹먹해졌을까. 시를 읽던 누님이 울컥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의 잔에 또 곡차를 채워주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이야기하였고, 아버지를 생각하였다.

터울에 따라 자라온 시간의 차이만큼 함께 공유한 추억과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추억이 조금씩 달랐지만 부모님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회는 다를 수가 없었다. 둘째 여동생이 <봄처녀>를 낭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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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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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 내리는 겨우내

안방 아궁이에 군불 지피고

누에고치 실 뽑아내듯 한 땀 한 땀

어머니는 싸리 바구니를 엮는다

​ ​

동구 밖 벌판에 훈풍 불어와

파릇파릇 보리 새싹 고개 내밀면

누이들은 싸리 바구니 하나씩 끼고

강가로 봄 마중 나간다

​ ​

눈 녹은 강 언덕 오가는

종달새 지저귐이

흥겨운 콧노래와 화음 이룰 때

냉이와 달래가 바구니에 가득했다

​ ​

누이들아 청산 가자

하얀 세월을 머리 가득이고

너른 벌판 가로질러

어린 시절 누이들 도란도란 건너간다

​ ​

​ ​

사시사철 마르지 않던 냇물을 건너 논밭으로 향하거나 솔숲을 지나 마실 나들이를 다니던 자신들의 이야기가 활자화되었다는 사실과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저 세월을 넘어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다는 것 자체를 서로 고마워했다.

눈에 선한 언덕 너머로 보이는 낮은 구릉 길을 따라 여전히 마음이 걸어가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40여 년이 지났지만 해마다 눈을 맞으며 우리는 여전히 그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머리마다 눈이 그렇게 하얗게 그토록 수북이 쌓였던 거구나. 빈 잔을 채웠다.

매제들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들 역시 그들만의 시간을 꺼내어 들여다보고 있지 않았을까? 세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장마>를 낭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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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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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나무 위에 앉은 청개구리가

올해도 먹구름을 부른다

긴 꼬리 장마 어여 오라고

어매가 싫어하는 먹구름 자꾸 끌어들인다

​ ​

황소 눈에 핏대 선 들판 위 벼들이

진흙 옴팡지게 뒤집어쓰고

납작 드러누웠던 날로부터

매양 놈들이 소리를 모으기 시작하면

어매 심장은 콩당콩당 허공을 가른다

​ ​

마을 앞 수둑빼기 방천이 무너지고

둑 아래 논벼가 수마에 몽땅 휩쓸려 가버린 건

틀림없이 저놈의 청개구리 때문이제

​ ​

초여름에 들려오는 놈들의 합창 소리

정지문에 가만히 기대고 서 있는

울 어매 노심초사는

쏟아지는 빗줄기로 주루루 흘러내린다

​ ​

공포가 넘실대는 황톳물 위로

뿌리째 뽑힌 나무와

휘둥그래 눈 뜬 뱀과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돼지와

가마니와

고무신과

질통들이 떠내려간다

​ ​

메마른 세월의 강을 타고

푸른 들녘에 퍼지는 한숨 소리

온 세상 근심이 둥실둥실 떠내려간다.

​ ​

​ ​

큰 비가 내리더니 섬진강이 범람하였다. 소떼 열 마리가 구례 사성암에 올라간 것이 언론에서 크게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 사무실에서도 교대로 며칠간 구례시장과 곡성의 수재 마을을 찾아가 복구현장에서 땀을 흘렸다.

구례시장을 찾아갔을 때 여름철인지라 생물이 부패하여 악취가 진동하였고 물에 잠겨 전혀 쓸 수 없게 된 가구들이 거리와 골목에 즐비하였다. 지하 공간에서 물에 잠겨버린 가재도구들을 끌어내는 데 너무 힘이 들어서 정말 맥이 풀렸다. 그래도 수해를 입은 주민들의 마음을 헤아려 지친 몸을 다잡고 흙탕물을 뒤집어쓴 시장과 가정을 돌며 청소를 했다.


한편 옛날 고향에서 강둑이 무너져 논이 모래에 파묻혀 큰 피해를 입었던 날의 악몽이 떠올랐다. 두 번의 대홍수로 피해를 입은 후 장마철만 되면 어머니는 홍수에 대한 트라우마를 떨치지 못하고 너무 힘들어하셨다. 남매들은 그 시절의 어머니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힘들게 쟁기질하여 일군 벼들이 하루 아침 강물에 휩쓸어가 버리는 광경을 목도한 사람들은 안다. 그것은 엄청난 공포이기도 하였다.

 

막내 여동생은 <철부지와 세뱃돈>이라는 수필을 읽었다. 누구나 세뱃돈을 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를 따라 옆집으로 세배하러 다녔던, 당시 예일 곱살의 동생도 오롯이 그 기억을 놓지 않고 있었다. 오랜만에 우리들에게서 저 멀리 흩어져 가버린 세월을 소환해준 시집 한 권을 들고 아련한 상념에 잠기기도 하고 함께 자리하고 공감한 시간을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김장하던 날 밤에 한 손으로 들기조차 힘든 큰 주전자에 담긴 곡차가 한 통으로는 부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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