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한국 사람들에게 월동준비의 끝판은 김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옛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땅속에 김장독을 묻는 대신에 김치 냉장고에 보관한다는 점일 것이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겨울나기를 위해서 준비할 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두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초가지붕 잇기와 김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해마다 농가에서 추수하여 탈곡하고 난 볏짚을 엮어서 만든 이엉(‘마람’이라고도 함)을 처마 끝에서부터 차곡차곡 일정한 간격으로 겹쳐 지붕을 덮는 작업을 ‘지붕잇기’라고 하였다. 초가지붕은 일 년쯤 지나면 볏짚이 낡아 비바람을 맞고 비가 새는 경우가 생기므로 가을걷이가 끝나면 새로운 짚으로 매년 교체해주는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지붕 잇기에는 마을마다 손끝이 야무진 사람이 있기 마련이어서 그의 도움을 받으려면 사전에 협의하여 순번을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가 좋았다.우리 마을에도 지붕 잇는 날에는 꼭 모셔가야 하는 분이 있었는데, 후배 J의 아버지였다. 그분은 무척 듬직하게 작업을 지휘하여 매일 한 가구씩 지붕 잇기를 끝내 갔다. 가장 꼭대기 부분인 용마루에는 ㅅ형태의 용마름을 엮어서 마감을 짓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새끼줄로 지붕의 동서와 남북방향으로 각각 연결한 후 처마의 서까래 끝에 고정해 놓은 연죽에 묶어 마무리하였다. 농어촌의 초가지붕이 기와나 슬레이트 지붕으로개량공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이엉과 마름을 엮어 지붕 잇는 일들이 중요한 연례행사였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모습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어졌다. 그나마 순천에서는 낙안읍성 내에 있는 백여 가구가 매년 늦가을 지붕을 잇는 데 여기에서 그 광경을 엿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월동준비는 김장으로 시골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부모님을 도와 해마다 추수가 끝나면, 12월 초쯤에 텃밭에 심은 배추와 무를 뽑아 김장하였다. 김장김치는 이듬해 신선한 야채가 나올 때까지 밥상을 책임지는 소중한 먹거리이다. 김장하는 날에는 특별히 물을 많이 쓰는 일인지라 집안의 작두펌프로 끌어올려 쓰려면 일이 더디고 마음껏 쓰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아예 집 앞의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로 온가족이절인 배추를 매고 지고 가서 씻은 다음 마지막에 펌프로 끌어올린 물로 헹구었다. 그런 다음에는 물기를 빼내고 배춧잎을 책장 넘기듯 한 장씩 넘겨 가며 미리 준비한 양념을 고루 바른 다음에 포기를 둥글게 말아서 땅에 묻어 둔 항아리에 차곡차곡 저장하였다. 당시에는 시골 가정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탓에 냉장고는 구경조차못 했던 시절이라 김장독을 땅속에 묻고 김치를 저장하여 일정한 온도로 유지한 것이다. 배추김치,무김치, 나박김치, 갓김치와 물김치도 넉넉하게 담갔다. 이 김장김치는 겨우내 식탁을 책임졌고, 찐 고구마 등을 먹을 때도 곁들여 먹으면 일품이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도 김장은 매우 고단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개월 키운 배추와 무를 뽑는 일에서부터 절이고 씻고 행군 다음에는 다시 양념을 골고루 발라야 하는 일련의 과정이 하루에 끝나지 않았다. 마늘이나 생강, 젓갈 등 양념 재료를 준비하여 껍질을 까고 갈아서 김장에 사용할 양념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면 거의 일주일 전부터 준비하는 힘든 일이었다. 도시 생활을 하면서부터 김장하는 양이나 방법이 뚜렷하게 달라졌다. 부모님은 우선 자신의 텃밭에서 쉽게 구하던 재료들을 하나하나 사서 쓰는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셨다. 그러다 보니 필요한 것만으로 한정되었다. 대신에 수도꼭지만 틀면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로 간편하게 작업을 끝낼 수 있게 되었고, 그나마 단독주택에 살았기에 마당 한편에 김장독을 묻어 겨울을 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결혼한 후로는 자연스럽게 김장김치를 얻어먹는 채널이 바뀌었다. 농촌에 있는 처가에서 보내주시는 장모님 손맛이 담긴 장모님표 김치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였다. 김장하러 일부러 시골에 내려가지 않아도 장인과 장모님은 다섯 남매에게 일일이 김장김치와 단감을 과일상자에 가득가득 담아 해마다 택배로 보내주셨다. 어디 그뿐인가. 가을걷이가 끝날 때마다 방앗간에서 햅쌀을 찧어서 바로 보내주시니 결혼한 이후로 한 번도 쌀을 사다 먹을 일이 없었다. 그 감사함을 잊은 적이 없다. 내가 지방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되자 처가와 보다 가까운 곳에서 지내게 되어 발걸음도 잦아졌다. 벼 모내기를 한다거나 김장철이 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1시간쯤 거리에 있는 처가로 달려가서 거들어드렸다.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으나 과연 그러했다. 김장만 놓고 보더라도 그동안 어미가 물어다 준 먹이를 가만히 앉아서 날름날름 받아먹기만 하다가 김장하는 날 가서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신의 자식들에게 보낼 김장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시에 사는 일가 친적 분들에게 보낼 것까지 해마다 10여 가구의 양을 담가서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니 김장 후에는 몸살이 나서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너무 힘들었다. 처가의 남매들은 앞으로 자식들 것만 하는 게 좋겠다고 하소연하면 그렇게 한다고 대답을 해놓고도 이듬해가 되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였을까. 장모님은 팔순 중반을 넘어서며 기력이 현저하게 쇠약해지셨다. 예전처럼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지자 드디어 자식들도 각자 도생하라는 선고가 떨어졌다. 사정이 이러하니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자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김장을 하였다. 지난해는 절인 배추를 사다가 담갔다. 아내의 음식 솜씨는 시어머니를 닮았는지 한마디로 별로 마음에 안 든다. 이 점은 본인도 깊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런데 올해는 둘째 누님으로부터 12월 초에 김장을 할 계획이니까 건너오라고 전화가 걸려왔다. 몇 해 전 은퇴한 둘째 누님네가 백양사 근처로 반귀촌하였는데, 한 달 전에 가 보니 컨테이너 두 개를 맞붙여서 나름대로 생활공간을 꾸며놓았다. 조카들이 모두 서울에 있으니까 살림을 완전정리는 못하고 무료할 때마다 왕래하며 지내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