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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우 Jul 27. 2020

나에게로 회귀


마을 정자에 그늘을 드리우던 오백 년 된 아름드리 당산나무가 태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고 내 기억마저 영영 사라지겠는가...




어느 곳인가 꼭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것과 언제라도 갈 수 있지만 안 가는 것은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르리라 생각된다. 나에게 고향 나들이는 후자에 속하지만, 선영에 간다거나 부고를 듣고 어쩌다가 고향 쪽에 가는 일이 생기더라도 읍내에서 상주와 얼굴도장을 찍고 되돌아오기 바쁘다 보니, 정작 내가 살았던 동네 안을 들여다보는 경우는 여간해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 다른 이유를 찾자면 일가친지들조차 모두 떠나버려 딱히 연고랄 것도 없고, 고향에 남아 있는 몇몇 지인들조차 읍내에 나가서 지내고 있다. 굳이 마을 안을 기웃거릴 일이 없다 보니 어쩌다 생각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그 날은 꽤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미 오래전에 지워져 버린 나와 내가 아는 이들의 체취를 찾아 나선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날 나는 태어나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마을, 학창 시절의 아련한 추억의 조각들을 퍼즐 맞추듯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며 온 동네 골목을 기웃거렸다. 마침 외지에 나가 살고 있는 선배가 모임이 있어서 내려왔다가 나와 동행해주었는데 그날따라 흰 구름은 어찌나 높게도 떠다니던지.
초등학교는 몇 해 전 폐교가 되어 무슨 식품회사의 부지로 탈바꿈해 버렸고, 예전에 육성회를 만들어 학교발전에 애쓰시던 유지들의 명단이 새겨진 비석이 있어서 이곳이 학업의 장이었다는 사실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었다.​ 운동장 가득 자라난 잡초가 한때 일천 이백 명의 동심이 뛰어놀던 곳이라는 사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면소재지에 있는 중학교도 마찬가지로 한참 학생이 늘어나던 시기에 비하면 십 분의 일도 안 되어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들 어디로 갔는가? 마을은 마을대로 인기척이 드물었다. 우리 가족이 처음에 살았던 집은 오래전 허물어 버리고 모씨의 비닐하우스가 서 있었다. 나중에 살았던 나지막한 야산 자락에 있던 집도 유력한 가문의 제각(祭閣)으로 개축되어 말쑥한 한옥이 자리를 잡았다. 매일 바지자락으로 아침 이슬을 털면서 등교했던 오솔길은 언제부터인가 아스팔트길로 번듯하게 포장되어 낯설게만 느껴졌다. 안톤 슈낙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지으면서 과연 이러한 기분을 이미 맛보았을까?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우리를 슬프게 한다


가슴 한편에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오십여 가구에 삼백 여명이 살았던 마을이 이제는 이십여 세대 삼십 명이나 될까. 게다가 연로하신 분들이 대부분이라니 반세기도 지나기 전에 세월이 훑고 지나간 흔적이 너무 처량하다. 큰 줄기세포에 저장된 기억은 긴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쯤은 나도 눈치채버렸다.
마을 정자에 그늘을 드리우던 오백 년 된 아름드리 당산나무가 태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고 여름날 뙤약볕에서 일하다가 점심 식사 후 모여서 느긋하게 오침을 즐기던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지워지겠는가?
수령 칠백 년의 느티나무도 그 이후 태풍으로 쓰러져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나무 위에 올라가서 수액을 빨려고 몰려든 풍뎅이를 손안에 가득히 잡아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사라질 수 있을까?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작고하신 나의 둘째 큰아버지, 즉 중부님은 상당히 낭만파였다. 농번기가 끝나면 소고에 장단을 맞춰가며 멋들어지게 시조가락을 읊으셨다. 인근 동네에서 시조를 좀 한다는 이들과 그 소리를 즐기려고 모여들던 노인정이 바로 중부님 댁의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라고 세월을 비켜가진 못했다. 노인정을 끼고 뒷동네와 옆동네로 이어지는 반들반들하게 닦여진 숲 속 지름길도 인적이 줄고 발걸음이 소원해지며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는 곳이 되었고 머지않아 노인정도 흔적도 없이 잡목에 싸여 숲으로 변할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마을은 허전해지고, 사람 소리도 완전히 줄어들었다.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마을이 흥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의미 없는 상상일 뿐이다. 농어촌에 인구가 들어 든 배경에는 사회적 현상, 국가정책 등 그 이유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실은 거기에 나도 한 몫하고 있는 셈이다. 산을 밀어서 바다를 매립하고 공장을 짓고, 새로운 고용을 창출한다지만 그 일손들은 모두 어디에서 오는가? 이런저런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지만 과거로 돌아가지 않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시간은 그렇게 또 흘러가리라.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내 의지와 관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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