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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우 Jul 26. 2020

부평초 위의 이슬


나는 이슬이 사라진 후에 남겨진 흔적이다


생명이 없는 물건보다 식물이나 동물처럼 살아 숨 쉬는 것들에 대하여 애정이 더 가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베란다에서 여러 화초를 가꾸어 보았다. 또 제법 오랫동안 어항에 아처피쉬, 마블구라미, 수마트라는 물론이고, 청소부라는 별명을 가진 코리도라스 메리니 같은 열대어들도 길렀다.
이 녀석들은 집사에게 놀아 달라거나 먹이를 달라고 소란을 피우지 않더라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그들 상태를 알 수가 있었다. 같은 종이라도 성격도 제각각이지만 나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물고기들을 더 기르지 말자며 어항을 말려서 베란다 창고에 넣어 두었다. 내가 일주일쯤 해외 출장을 가게 되면 남은 식구들이 먹이를 챙겨주어야 하는데 통 관심을 안 가져주니 배고픈 물고기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기 일쑤여서이다.

해마다 사월에 광양 다압 마을을 중심으로 매화꽃 축제가 열린다. 그 무렵이 되면 청매실 농원 일대와 섬진강 건너 쌍계사 입구는 만발한 매화와 벚꽃을 보려고 전국에서 밀려드는 상춘객으로 북새통이 된다.
구례 산동마을의 산수유도 일품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아도 남해대교를 건너면 바다와 어우러진 벚꽃도 꽤 장관이다. 유월 중순은 매실 수확의 절정시기이다. 이때에는 일손이 부족하여 우리도 하던 일들을 잠시 멈추고 조를 나누어 반나절씩 차양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매실 따기 봉사활동에 나서곤 한다. 매실에 대한 효능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예전에 드라마 ‘허준’ 덕분에 대중적으로 더 유명세를 얻은 것도 사실이다.

살다 보면 어떠한 계기로 이전에 무관심했던 것들에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나 역시 남도에 내려와 주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흉내내며 살아간다. 이를테면 대형 유리병이나 플라스틱 통에 매실, 복분자, 오미자, 유자와 같은 열매들을 발효시켜서 만드는 효소 같은 게 그러한 흉내의 일종이다. 경험을 통해서 지혜도 생겼다. 흙으로 빚은 항아리가 병이나 플라스틱 통보다 왜 좋은지 이해하게 된 것이다. 섭취하여 육신의 일부가 되는 것들은 그 속에 생명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발효란 수없이 많은 미생물들의 분해 과정을 통한 새로운 물질로의 변신이기에 절대로 산소가 필요하다.
이런 소소한 먹거리들을 소꿉장난하듯 만지작거리다 보면 어려서 농사일로 분주히 사셨던 부모님이 떠오른다. 그리고 해마다 고추장, 된장, 간장은 물론 김장을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모두 발효식품으로 한두 해씩 집안의 식탁을 책임질 가장 기본 요소들이었기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쓰셨던 기억이 지금에 와서 더욱 선명해진다.

올해는 버찌와 매실을 새로 담을 옹기가 필요해졌다. 화창한 날 외곽에 있는 옹기점에 들렸다. 주먹만 한 간장 종기와 된장 그릇에서 종가의 쌀독으로나 쓸 법한 초대형 옹기들. 다양한 그릇들을 구경하다가 구석진 자리에 있지만 시선을 끄는 게 있어서 다가가 봤다. 입구가 넓은 옹기에 부평초가 열 뿌리쯤 물 위에 떠 있다. 아담한 항아리 네 개를 사서 차 트렁크에 실은 뒤 옹기점 주인에게 한 뿌리를 달라고 했더니 선뜻 떠 준다.
내가 마른 창고에서 어항을 꺼내어 베란다에 자리 잡고 물을 채우고 있는데, 아내가 모기떼를 기를 거냐며 탐탁지 않은 표정이다. 못 들은 체하고 얻어 온 한 뿌리를 물에 띄워놓고 날마다 가만히 내려다본다.

어느 휴일 아침, 습관처럼 베란다 문을 열고 어항을 내려다보니 부평초 위에 은방울처럼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문득 너털웃음 웃기를 잘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세상살이 좋은 일만 있었을 리 만무지만, 모든 것을 웃음으로 얼버무리셨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당신은 생전에 우리 인생을 <이슬>에 비유하기를 좋아하셨다.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게 이슬이다.
아버지는 지천명을 넘어 전답을 정리하고 고향을 떠나며 인생역정에 <부평초>라는 단어 하나를 추가하셨다. 시골에 남아 있었다면 자식들은 더 큰 배움이 어려웠을 것이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겠지만, 아버지의 선견지명으로 분신들은 각자 원하는 색깔과 크기의 날개를 달았다. 평소의 말씀처럼 당신은 부평초 위에 내려앉은 이슬이고, 우리 남매들은 이슬이 사라진 뒤에 남겨진 <흔적>이다. 지금 부평초는 달포 사이에 여러 갈래의 줄기를 내며 왕성하게 번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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