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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우 Dec 27. 2021

나의 애송시 (1) 목마와 숙녀

ㅡ목마와 숙녀 / 박인환

나의 애송시 (1) 목마와 숙녀 / 박인환



서울에서 전철을 타려고 지하 승강장에서 줄을 서다 보면 승객의 안전을 위하여 승강장에 크린도어 설치되어 있는데 그 중간중간 유리에 부착된 시(詩) 만날 수 있다.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마음의 여유를 갖으라는 배려일 것이다.

학창시절 우리는 교과서에 실린 여러 장르의 시들을 접하였고, 감성이 넘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슴앓이하듯 그 시들을 외우며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문학소년, 소녀가 되곤 했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때의 기억을 오롯이 지닌 사람들은 지긋한 나이가 되어서도 햇과일 같은 풋풋한 추억을 소환하며 미소를 머금곤 한다.


내가 기억하는 시 중에 특히 뇌리에 단단히 박혀 결코 빠져나가는 법이 없는 시가 있는데, 바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이다. 이 시는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약간 어두운 느낌의 목로주점과 은은한 음악소리가 하나가 되어 두런거리는 듯한 속삭임처럼 조용히 다가온다. 1980년대는 음악다방이 성행했던 시기로 유리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DJ가 신청곡을 받아서 LP에 새겨진 음악을 틀어주던 시기였다.

당시 나는 가끔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앞에 있던 K서적 입구에서 친구들과 만나 음악다방에 가거나 근처 호프집에서 자리를 잡고 우울한 80년대 초반을 보냈었다. 친구들도 암울한 시대적 배경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제법 방황하고 있던 때이다.


1955년 『박인환 시 선집』에 실렸던 대표 시 <목마와 숙녀>는 빛을 잃은 듯 암울한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였는지 특히 여학생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시 중 하나였다. 대학가에선 연일 데모 진압대가 쏘아 올린 최루탄 가스로 눈물을 흘리며 흩어졌다가 삼삼오오 선술집으로 모여들어 대폿잔을 기울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목마와 숙녀>라는 시는 인생의 허무함과 쓸쓸함으로 가득 차 있다. 별이나 사랑, 문학, 인생의 환희 따위를 모두 덮어버리고 부서지고, 떠나거나 죽고, 목메어 우는 것으로 귀결되는 축축한 시이다. 그 무렵 우리들의 마음도 그러했었나 보다. 어쩌면 그 시를 읽고 낭송함으로써 그런 기분이 든 것처럼 다들 착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이제는 초로에 접어든 나이가 되었건만 여전히 처음 접했던 느낌이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멈춰 있다. 아무튼 이 시는 연이 나누어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숨 고를 것도 없이 독백하듯 지금도 중얼거리곤 한다.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평소 좋아했던 시 몇 편 외워보자는 생각으로 도전한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이 시이다. 그런데 시를 외우 전후 맥락이 상당히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다시 말해서 앞 문장을 외울 때 뒷 문장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어휘로 연결성이 적다는 점이다. 물론 반복을 통해서 외울 수 있었지만 그만큼 더 생각하며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 시가 세상에 나오고 70여 년이 흐른 현재도 형태는 다르지만, 여전히 진로 문제 등으고민하고 방황하는 청춘들 존재한다는 사실을 거듭 인식하고 그들의 용기 있는 삶을 축원고 싶다. 깊어가는 겨울 밤하늘 별들을 올려다보며 오늘도 조용히  시를 음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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