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조선산업의 명암
ㅡ 조선업 호황기와 그 이후
산업단지 내 투자유치에 성공하여 몇 해 전 입주한 회사의 대표이사와 업무협의가 있어서 방문했다가 착잡한 마음으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최근 몇 년간 한국경제의 성장률이 정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업종이나 기업에 따라 상황은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제조업체들이 많이 입주해 있는 산업단지에서 요즘 생산라인이 풀가동되는 상황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전국적으로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면서 일자리가 그만큼 줄어들고 이에 따라 국가경제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걷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2000년대 들어 새로 조성된 율촌1산단에 입주를 희망하는 기업이 쇄도했던 시기는 특히 2007년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해외에서 수주받은 신조 선박에 대한 일감이 넘쳐났고, IMF 이후 한동안 공장부지 조성 사업이 큰 진척을 보지 못했다가 이 무렵 기업의 입주수요가 늘어나면서 신속한 조성사업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광양만권의 주력산업은 광양제철소로 중심으로 한 철강산업과 여수 국가산단의 석유화학산업인데, 광양항을 확장하여 철강, 화학, 항만 등을 토대로 남중권 경제벨트를 구축함으로써 미래 산업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려는 목표를 조금씩 이루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1994년 8월 현대자동차는 연간 30만 대 규모의 자동차를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전남도와 율촌산단 270만 평 가운데 160만 평을 대행 개발하여 입주하기로 계약하였다. 그러나 현대건설이 산단 조성을 위한 공유수면(바다) 매립공사만 일부 하는 상태에서 자동차 공장 설립 투자에 대한 진척이 별로 없다가 IMF가 발생하면서 기아자동차 인수하고, 미국 앨라바마에 현지 자동차 생산공장을 설립함으로써 율촌1산단 내 자동차 생산공장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현대자동차 연관기업의 투자로 자동차산업 클러스터는 현실화되지 못했고, 다만 현재는 자동차계열의 현대하이스코(현재 현대제철)가 냉연강판과 단조부문 등 2개 공장과 해상 철구조물을 제작하여 수출하는 현대건설 계열사인 현대스틸산업의 투자가 이루어져 그나마 순조로운 기업 활동을 영위하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자동차 라인이 율촌1산단 내에 입주했더라면 율촌산단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공장들도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이 지역의 경제지도가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아무튼 현대자동차의 입주 불발로 새로운 투자자 물색에 고민하던 중 조선산업의 경기가 살아났다.
조선업의 특징은 고도의 설계기술과 수많은 소재부품 개발, 다수의 숙련된 조립 및 가공기술들이 밑받침되어야 하는 분야이고, 고용효과가 매우 큰 산업군이다. 자료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2007년 말 세계 조선업체 순위를 보면, 수주잔량(CGT ; 부가가치를 고려한 톤수) 기준으로 세계 10대 기업 중 한국 조선사가 7개사에 이를 만큼 대약진을 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세계 조선업체 순위(2007년)
1. 현대중공업(한) 1444만 9천 톤
2. 삼성중공업(한) 1094만 4천 톤
3. 대우조선해양(한) 968만 7천 톤
4. 현대미포조선(한) 504만 1천 톤
5. STX조선(한) 416만 2천 톤
6. 현대삼호중공업(한) 401만 톤
7. 중국 다롄조선(중) 385만 톤
8. 중국 CSSC 290만 3천 톤
9. 성동조선해양(한) 280만 9천 톤
10. 상하이 와이가오치아오 조선(중) 270만 9천 톤
※ 자료: 영국 클락슨, CGT 기준
국내에서 조선산업이 발달한 지역은 남동권으로 울산, 거제, 옥포, 부산 등지인데, 이 무렵 조선산업의 활황에 따라 영암, 군산 등에도 신조 공장이 들어서게 된다. 또한 대기업에 선박 블록을 건조하여 납품하던 협력업체 중에도 넘치는 물량으로 작업공간이 부족하여 보다 넓은 공장부지 확보가 절실했다. 그러나 블록이 완성되면 몇 백 톤씩 나가는 중량의 철 구조물을 바지선에 싣고 완성단계의 조립이 이루어져야 할 조선소로 이동하려면 해수면에 접한 부지가 불가결한 요소이지만, 아무리 서둘러도 수심이 확보되는 임해 산업단지의 조성에는 시간이 필요하여 저렴한 부지를 적시에 공급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이러한 때에 율촌1산단은 블록공장을 짓겠다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미 준비된 저렴한 땅이었다. 부산.경남 일원에 소재하던 조선소나 선박 구성품 제작업체들이 몰려왔다. 이 가운데 특히 해수면 안벽(岸壁)을 더 길게 확보하려는 2개 회사의 경합이 치열했다. 안벽의 길이가 길수록 선박 제작과 접안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28만 평 이상 부지를 확보하려는 O사의 PM(Project Manager)은 Y팀장이 맡았고, 12만 평을 분양받으려는 R사는 내가 PM으로 지정되어 회사와 경제자유구역청 간 의견을 조율하고 내부 절충안을 모색해야 되는데,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려있는 문제인지라 양쪽 회사가 서로 좀처럼 양보를 하지 않았다.
O사의 L 회장과 R사의 J회장은 해수면을 더 많이 확보함으로써 사세를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서로 자존심을 걸고 경쟁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분양계약을 마친 두 회사였지만, R사는 현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기업 활동을 지속하고 있으나 무리하게 사세 확장을 도모했던 O사는 급변하는 조선경기의 불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매각을 기다리는 처지에 놓여 있다.
산이 있으면 골도 있는 것인가, 이후 한국은 2012년부터 2017년까지 6년 연속으로 연간 수주량 순위에서 중국에 밀려 계속 2위에 머물렀다.
한국은 2018년 LNG(액화 천연가스)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일감을 싹쓸이하며 2011년 이후 처음으로 1위 했다. 2018년 조선업황은 확연히 회복세를 나타냈다. 최근 3년간 누계로 보면,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은 2016년 1340만 CGT이었는데 2018년 2860만 CGT으로 조금씩 증가세이다. LNG선 수주로 조선업계에 분위기를 보면 현장에서는 얼마간 기대감도 갖고 있으나 낙수효과를 실감하기에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나라나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 선진기술을 도입하며 초기에는 고도성장을 이루다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성장률이 둔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세계 경제와 상호 의존적 관계로 연계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된다. 그 과정에 새로운 제품이나 시장의 출현이 일정한 패턴으로 경제활동에 영향을 끼치게 되며 불황, 회복, 호황, 후퇴 단계 등을 거치며 순환하는데, 경기순환(business cycle)은 단기적 순환과 중장기 순환의 주기로 되풀이되곤 한다.
처음 이 글을 작성했던 것은 2019년 하반기였으나 2020년 6월 말 시점에서 보자면, 조선업계의 일감 변화가 엿보인다. 연초부터 예상치 못한 코로나 19의 팬데믹으로 대부분의 산업들이 영향을 받고 있고 언제까지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이 와중에 2020년 6월 1일 자 국내언론 발표에 따르면, 부가가치가 높은 LNG선을 국내 조선 3사(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와 카타르 국영석유소가 100척 이상의 LNG 운반선 발주 권리를 보장하는 약정을 체결했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최종 수주계약으로 낙수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아직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겠지만, 이는 전 세계 LNG선 건조량의 60%에 달하며, 금액으로는 23조 원대에 이르고 5년 치 일감을 확보했다는 의미라 하니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가 아닐 수 없다. 추가로 기대하고 싶은 것은 LNG선 제작에 필요한 기술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산업은 계속 변화하고, 경제구조도 기존의 질서나 형태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바뀔지라도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항상 꿈꾼다. 지금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다면 새로운 산업분야에서 빛을 볼 날이 도래하리라 믿는다. 물론 끊임없는 정부의 규제개혁 위에 기업가 정신과 열정, 세상을 담을 수 있는 보다 넓은 안목은 기본 요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