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구 없는 욕망의 자폭

코랄리 파르쟈 감독의 <서브스턴스>을 보고

by 송동섭

영화 <서브스턴스>를 보는 중에 연상되었던 것은 소재의 반복, 표현의 과장, 장면의 기시감이다. 우선 가장 첫 번째 눈에 띄었던 것은 소재의 반복이다. 영화 <서브스턴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물질)을 제공받기 위해 외출할 때 착용한 옷은 노란색 코트다. 왕년에 스타로 자기 집에서 할리우드가 내려다보이는 집에서 살고 있지만 그녀의 외출복 색상은 언제나 노란색 코트다. 심지어 자신의 신체가 퇴화되는 순간에도 그녀가 착복한 의상은 동일하다. 그녀가 입은 코트의 노란색은 그녀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상징한다. 이외에도 감독은 색상(파란색, 빨간색, 백색)을 반복해서 표현하면서 그 색상이 의미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표현의 과장이다. 영화에서 엘리자베스와 수가 에어로빅하는 장면은 여성의 신체를 집요할 정도로 과장하고 있다. 여기서 수의 신체는 엘리자베스 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으로 과장한다. 영화 초반에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과장이 남성의 시선에 고정하는 듯하지만 과장된 표현으로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대중의 욕망이다. 영화 <서브스턴스>에서 엘리자베스나 수는 자의든 타의든 여성이면서 욕망의 주체로 중심에 서 있다. 그리고 제작자 하비와 동영상을 촬영하는 카메라맨들이 남성의 욕망을 대표한다면, 새해맞이 축하 쇼에 참석하기 전 하비와 함께 있던 투자자들 모두 흰 머리의 나이 지긋한 남성으로 배치한 점은 노인의 시선이면서 그들의 욕망을 상징한다. 그 축하 쇼에서 관객으로 어린 여자아이의 등장은 대중의 욕망이 세대를 구분하지 않는 것으로 읽힌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는 대중의 욕망을 감독은 분산 배치해 둔 것으로 보인다.

영화 <서브스턴스>를 보면서 연상되었던 것으로 장면의 기시감이다. 대표적인 장면으로 영상 제작사 건물의 복도인데, 이 복도의 바닥은 일정한 모양의 패턴이 반복되어 있고 길이는 길고 그 끝은 좁게 표현되어 있어 복도가 막혀 있거나 소실되는 것 같이 보인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년)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데 이런 장면들은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처한 폐쇄된 상황을 상징한다. 이것과 유사한 표현으로 샤워실에 갇혀 웅크려 있는 주인공의 부감 숏 역시 제한된 공간에 고립된 인물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코랄리 파르쟈 감독은 <서브스턴스>에 관해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상징주의로 가득합니다” 라고 말했다. 영화 <서브스턴스>를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영화 속에 담아낸 상징적인 요소를 읽어내야 한다는 안내와 같은 조언이다. 그런 면에서 감독은 상징적인 요소라는 도구와 반복, 과장 그리고 오마주라는 방법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담아내려고 한 것이다. 그러면 감독이 담아내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욕망’이라고 보았다.


영화 <서브스턴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욕망‘은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젊음에 대한 욕망이다.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왕년에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자신의 이름이 새길 정도로 유명한 배우다. 하지만 나이 먹은 그녀에게 왕년의 인기는 시들어진지 오래다. 제작자는 그녀를 대신할 젊은 여성을 고용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를 안 엘리자베스는 젊음을 회복해 준다고 하는 물질(서브스턴스)에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에 물질을 투입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생성된 또 다른 나, 수가 분리된다. 여기서 분리된 수 역시 인기라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엘리자베스에서 분리 생성된 수는 완벽한 외모로 주체할 수 없는 대중의 인기(욕망)를 얻게 되고 7일씩 분리 활동할 수 있는 규정을 조금씩 위반한다. 신데렐라 동화에서 보던 시간에 관한 규정의 말랑함은 영화 <서브스턴스>에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 위반의 대가는 백색의 욕실처럼 차갑고 냉정하며 처참하고 비극적이다.


영화 <서브스턴스>에서 보여주고 있는 ’욕망‘의 두 번째는 먹는 것에 대한 욕망이다. 영화 <서브스턴스>에서 과장된 표현으로 음식을 섭취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먹는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 동시에 또 다른 욕망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제작자 하비가 보여 준 음식물 섭취 장면은 그의 식욕 외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영상물을 제작하고자 하는 그의 내면의 욕망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음식 섭취하는 장면을 초근접 하여 촬영하여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줌으로 그가 갖고 있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저급하고 불쾌하게 전달한다. 먹는 것에 대한 욕망의 다른 표현으로 엘리자베스가 하비에게 퇴직 선물로 받은 요리책으로 요리는 하는 장면이다. 그 요리책에 있는 요리의 소재가 육류인 것은 영화가 담아내고 있는 신체의 훼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엘리자베스가 보여준 요리의 실패는 먹을 수 없는 것이 되는 재료에 대한 훼손이고 위해다. 이것은 물질에 의해서 여성의 신체가 훼손되는 것의 상징이면서 욕망에 의해 육체가 파괴되는 영화 결말에 대한 예고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영화 <서브스턴스>가 담아내고 있는 ’욕망‘은 이전에 언급한 욕망에 비해 노골적이지도 분명하지도 않은 대중의 욕망이다. 주인공 엘리자베스나 수 그리고 하비 모두 그들의 욕망은 불특정 대중의 인기(욕망)에 수렴된다. 젊음, 건강함, 왕성함은 모두 인기를 위한 수단이며 도구다. 그것들이 대중의 욕망에 부합되는 도구로 사용될 때 그들의 인기는 증폭된다. 이 지점이 감독 코랄리 파르쟈가 말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욕망이면서 해결되지 않는 혹은 해결할 수 없는 대중의 욕망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대중의 욕망은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엘리자수로 일그러져 응집된다. 과연 대중의 욕망은 제어 혹은 절제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감독이 내놓은 답은 일그러진 욕망의 잔혹한 변형으로 엘리지수를 형상화하였고 대중을 향해 피를 분출하는 것으로 자폭의 지옥도를 연출함으로 욕망의 탈출구가 없다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는 듯하다.


엘리자베스는 수의 욕망으로 훼손되는 자신을 보며 수의 재생을 막고 죽이려고 할 때 그녀의 눈에 띈 메모는 ’They are going to love you’(넌 사랑 받을 거야)다. 이 메모를 보는 순간 그녀는 수를 죽이지 못하고 재생시키게 되는데, 이 장면은 엘리자베스가 대중의 ‘인기’(욕망)를 불변의 숭고한 가치인 ‘사랑’으로 인식하는 심각한 착오를 보여주는 것이다. 재생된 수는 엘리자베스의 또 다른 물질(젊음, 건강함, 왕성함)에 불과하며 그 물질을 제한적으로 소유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이지만 대중은 숭배하고 열광하며 하비는 그것이 자신의 부와 직결되기 때문에 수가 가진 물질(젊음, 건강함, 왕성함)에 몰입하고 욕망한다. 영화 <서브스턴스>는 개인과 대중을 하나의 폐쇄된 욕망의 고리로 묶어 물질에 의한 물질을 위한 세태에 대한 비판을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서브스턴스’(물질)인 이유이다.


영화 <서브스턴스>의 끝은 엘리자수의 몸에서 분리된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자신의 이름 새겨진 대중의 욕망으로 형상화된 스타(별)모양에 이르러 하늘에 있는 실제 별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이 파괴되면서 마무리된다. 별(스타)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별의 모양(물질)일 뿐 모든 것이 파멸에 이르러서야 실존의 별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의 허무함은 단지 왕년의 스타였던 엘리자베스만의 헛웃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영화 <서브스턴스>는 욕망의 거품에 허우적거리는 지금의 우리 일면을 공포스럽게 풍자하고 있다. 물질을 욕망한 육체를 산산조각을 내면서

image.png


작가의 이전글아담과 이브, 그리고 미친 가속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