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을 보고
영화를 보기 전 ‘세계의 주인’이라는 제목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세계를 영어로 world(세상)와 reality(현실)로 구분해 보면 world는 유형의 실질적인 물리적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reality는 무형의 현상으로서의 세계에 가깝다. ‘세계의 주인’이라는 제목에서 세계를 유무형의 세계에 대한 의미로 구분해 보면, 물리적인 세상의 주인에 관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현실적인 삶에 관한 이야기인지 영화 감상 전에 상상해 볼 수 있다. 다만 이전의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과 <우리집>을 감상해본 관객이라면 첫번째 물리적 세상의 주인 이야기는 아니지 싶어 잠시 접어둘 것이다.(물론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거지 제로는 아니다) 그렇다면 ‘세계의 주인’이라는 제목은 실존적 삶에 관한 이야기로 감상하기 전 예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예상이 빗나갔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영화 시작 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주인공 이름이 ‘주인’이라는 점이다. 영화 제목 ‘세계의 주인’에서 주인은 ‘소유’의 의미인 ‘주인’이 아닌 고유명사 ‘주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선뜻 영화 제목이 ‘주인의 세계’가 마땅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감독은 영화 제목을 ‘세계의 주인’으로 한 것이다. 처음 제목을 마주한 이들에게 예상이 비껴갈 것을 감독은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감독의 의도가 단지 언어의 유희와 같은 위트의 가벼움보다는 그 이상의 무게를 더한다. 감독은 영화 제목을 ‘세계의 주인’이라는 중의적 표현으로 복선을 깔고, ‘주인의 세계’를 담아내는 비틈과 꼬임의 재치를 보이면서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세계의 주인’이라는 의미를 되새기게 하여 감상자를 골몰하게 한다.
윤가은 감독은 2016년 <우리들>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알렸다. 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이 겪을 법한 상황을 주인공의 시선과 감정 중심으로 이끌어낸 연출이 돋보인 작품이다. 단지 초등학생인 아이들의 감정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시절을 통과한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의 고민에 공감하게 하는 연출이 주목받았다. 이어서 2019년에 <우리집>이라는 작품에서도 <우리들>에서 보여준 자신의 장점을 살려 초등학생 5학년 여학생과 우연히 알게 된 아이들을 통해 다시 한번 그들의 고민을 표현하면서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윤가은 감독만의 장점을 재확인시켰다.
영화 <우리들>과 <우리집>은 일반적이고 평범할 것 같은 제목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의미를 담아내는 연출로 제목이 갖는 상징성을 도드라지게 했다. <우리들>이라는 작품에서는 ‘우리-들’이라고 표현하여 우리라고 하는 하나의 묶음을 다시 ‘들’이라는 복수 접사를 붙여 하나로 묶이지 않는 다양하지만 불완전한 우리들의 가변성을 내포하는 듯하다. 영화에서 보면 하나로 묶일 것 같은 ‘우리’들은 우리라는 관계 안에서 타자화된 한 개인의 고립과 소외의 변주가 반복된다. 하지만 그 변주의 반복으로 인한 힘겨움은 성숙과 성장의 과정이라는 여운을 남긴다. 영화 <우리집>에서는 전편의 ‘우리’의 연작처럼 두 개의 ‘우리집’을 설정하는데, 두 가정은 각각 구별되고 대비되지만 각각의 집은 불완전한 상태로 아이들에게 불안의 원인이 된다는 점은 동일하다. 각 가정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부모님의 화합과 주거의 안정)이 결핍되어 있어 서로에게 충족된 조건을 갈망하지만 현실은 아이들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이에 아이들은 순진하게도 우리끼리 ‘우리집’을 만들어 볼까 하는 대사를 나누게 된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신들이 종이상자로 만든 그럴싸한 집을 만들어 지방에서 일하는 부모님에게 보여주기 위해 호기롭게 집을 나섰지만, 오히려 종이로 만든 화려한 집은 짐이 되어 무참히 밟아 폐기하는 것처럼 그들이 만들고자 했던 ‘우리집’은 순간의 허망한 위로와 같이 휘발된다. ‘우리집’은 우리(나)의 집이면서 영화에서 표현된 나와 너의 각각의 우리(들의)집이기도 하고, 아이들이 상상하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순진한 생각의 ‘우리집’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그들이 생각하는 집은 평온하고 주거가 보장된 아이들 눈에는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은, 하지만 영화에서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불가능이 어쩌면 현실에서도 영화 속 아이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우리(들의) 집의 현실을 보여준다.
<세계의 주인>이라는 제목이 중의적인 것은 윤가은 감독의 이전의 작품의 제목이 보여준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것에 연장이다. 이번 영화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주인’으로 설정하여 영화 내용은 ‘주인의 세계’일 것과 같고 그것을 비틀어 세계의 주인이라고 표현한 것 같지만 오히려 감독이 방점을 찍고자 하는 것은 ‘세계의 주인’이라는 것에 가까울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소재는 성폭력과 그의 피해 당사자와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시선과 태도다. 주인공이 다니는 학교 주변에 성폭력 가해자가 석방되어 거주하는 것에 대해 주인의 동급생 수호는 전학생을 대상으로 거주 반대 서명받는데, 유일하게 주인만 서명을 거부한다. 그 이유는 서명서에 ‘피해자의 영혼을 파괴하는’ ‘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주인은 과거에 친인척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다. 하지만 영화 초반 주인의 모습은 도발적이면서도 여느 여고생과 다르지 않은 밝고 쾌활한 학생이다. 지난 성폭력의 상처를 갖고있는 피해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즉 피해자에 대한 일방적이면서 고정된 보호가 당연하다는 것을 수호의 태도로 보여주고 있다면 감독은 그 일방적이고 고정적인 태도에 물음을 던진다. 게다가 단지 그것이 성폭력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어쩌면 각각의 개인이 갖고 있는 상처에 대한 인내와 극복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목에서 ‘세계’는 서정적이기 보다 서사적 의미에 가깝다. 맞서야 하고 대결해야 할 극복의 대상인 현실의 세계인 것이다. 반대 서명에 거부한 주인을 향해 누군가가 주인에게 쪽지를 남기는데, 그 내용은 ‘거짓말쟁이’ ‘너 괜찮은 거 맞아?’라는 일반적인 사회적 인식의 고정 관념이고 피해자의 행동에 대한 강요로 보인다. 피해자이면 피해자처럼 행동하라는 협박과도 같은 것이다.
영화 <세계의 주인>은 사회적으로 편향되고 고정된 시선과 개인적인 상처 극복의 메시지를 몇몇 시퀀스를 통해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단서처럼 표현하고 있다. 우선 교무실에 놓인 사과를 보고 주인이 호흡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반응을 보이자 선생님이 ‘너 사과 알러지 있니?’ 라고 하자 ‘장난입니다’ 라는 대사는 주인이 자신에게 주어졌을 무수한 사과謝過 에 대한 그녀의 반응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수호와 집단 서명 과정에서 실랑이를 벌이면서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였다는 것이 학교에 알려지게 되고, 수호와 다툼으로 발생한 학폭 무마 회의를 마치고, 엄마의 차 안에 자동 세차 중에 오열하는 장면은 주인이 얼마나 그 고통의 시간을 힘겹게 견뎌내고 있었는지, 그 주변 가족 역시 그 고통을 아프게 바라봐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영화에서 주인의 남동생 해인은 학교에서 마술 시연하면서 발표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걱정 근심거리를 쪽지에 적게 하고 그것을 모아 사라지는 마술을 보이려 하였다. 하지만 근심거리가 적힌 쪽지가 담긴 박스가 쏟아지면서 마술은 실패하고 발표회에 참석한 이들의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이 장면은 어쩌면 우리가 갖고 있는 근심과 걱정거리 혹은 깊은 상처가 마술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닌 맞서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장면으로 영화에서 주인과 같은 성폭력 피해자 역할을 한 미도는 청소년 시기에 태권도장에 머물면서 도장의 벽을 태우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태권도장 일부의 벽이 검게 그을려 있는 장면이 있는데, 원장은 도장의 내부를 수리하면서 그 부분을 남겨둘 것을 수리업자에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상처와 아픔에 대한 맞섬. 지난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 머물거나 매몰되지 말고 직시하고 바라봐야 할 것이라고 감독은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영화 끝부분에 주인에게 장문의 쪽지가 전달된다. 이전에 전달되었던 쪽지와는 다른 내용으로 너(주인) 같이 당당한 네가 부럽고, 나도 너처럼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내용이다. 이 쪽지 장면을 나레이션으로 연출하면서 감독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동급생들의 목소리로 한 문장 한 문장 다른 음성으로 전달한다. 여기서 감독은 우리 모두는 크고 작든 간에 누구든 내밀한 상처를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 그 상처에 보듬어 주는 위로를 넘어 스스로 극복하고자 하는 용기가 필요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이 ‘세계의 주인’인 것은 ‘주인의 세계’를 통해서 관객에게 각자가 스스로 마주 서야 할 ‘세계’의 ‘주인’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 안의 상처가 아프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견디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