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불혹의 나이에 난 지인으로부터 묵직한 꿈 보따리를 받았다. 독일에서 삼 남매를 키우며 앞만 보고 달리던 내게 어려운 수학 문제 같았다. 그건 바로 ‘다운증후군’ 셋째 딸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이었다. ‘작은 날갯짓의 나비효과로 누군가에는 공감되며, 위로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용기가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나 혼자 풀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꿈 보따리를 ‘낑낑’ 거리며 라이팅포라이프 박성희 선생님 앞에 내려놓았다. 선생님은 하나하나 짚어가며 함께 풀어가 주었다. 그 안의 재료는 이야기가 되었다.
풀어내는 이야기는 추억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계속 쌓일 것 같은 이야기는 2022년 10월 어느 날 멈췄다. ‘삼 남매를 돌보는 현실에서 이게 맞나?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질문이 그림자가 되어 따라붙었다. 어렵게 풀었던 꿈 보따리를 다시 끌어안았다. 마음 저 깊숙한 곳으로 숨기며 2022년을 마무리했다.
2023년 난 꿈을 숨긴 채 엄마로서 바쁘게 살았다. 첫째 듬직이의 사춘기로 고군분투했으며, 둘째 테디베어의 학교 유급으로 심적으로 힘들었다. 그리고 ‘다운증후군’ 셋째 딸의 언어치료에 정성을 쏟았다. 삼 남매와 함께하는 일상에 잔잔한 호수만 존재하면 좋으련만, 파도가 몰아치는 거친 바다로 돌변할 때도 있었다.
독일에서 나고 자란 듬직이의 사춘기가 그러했다. 한국에서 자란 나와 문화적 차이는 적정선을 찾지 못했다. 서로의 감정은 실타래처럼 엉켰다. 앞으로 듬직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6년뿐이었다. 18세가 되면 대학에 진학할지, 직장인이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듬직이만 데리고 맛집 투어를 가장한 데이트를 했다. 맛있는 거 앞에서는 깐깐하던 듬직이도 무장해제 됐다. 듬직이의 심경이 어떤지 뭐가 필요한지 살필 수 있는 기회였다.
밥을 먹으며 서로의 고민을 공유했다. 내가 먼저 툭 던지듯 말했다. “요즘 엄마의 고민은 흰 머리카락이 늘어가는 거야. 엄마는 늙어가고 듬직이는 어른이 되어가네.”라는 말이 끝으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먹느라 눈도 마주치지 않던 녀석은 무심한 듯 “엄마, 괜찮아 엄마가 늙어가도 멋있어. 왜냐면, 나를 잘 키워냈잖아”라는 말에 목이 매였다. 철부지 반항아로 대했던 마음이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우린 그렇게 실타래를 풀어갔다.
둘째 테디베어는 학교에서 유급당했다. 부끄러움이 많고, 낯가림이 심한 둘째의 담임은 엄격했다. 유치원에서 학교로 넘어가는 중요한 시기에 만난 담임. 친절하기보다는 아이를 잣대로 제기 바빴다. 둘째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쩌면 유급이 수순이었을지도. 새롭게 만난 담임은 친절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둘째의 적응을 기다려줬다. 유급한 반에서 유치원 때 함께 했던 친구를 만났다. 둘은 금방 단짝이 되었다. 그동안 가슴 언저지리에 얹혀있던 긴장감은 소화가 되어 내려갔다.
'다운증후군’ 셋째 딸은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이중 언어는 셋째의 말을 더디게 했다. 두 언어를 알아듣고 적재적소에 말을 해서 놀라움을 자아내기도 헸지만. 한국에서 모국어를 쓰는 아이들에 비해 현저히 늦었다. 언어치료 선생님과 상담을 통해 앞으로 방향성을 잡았다. 선생님은 집에서 꾸준히 함께해 줘야 한다며 자료도 공유해 줬다. 공유받은 낱말 카드와 사진을 직접 만들며 아이에게 집중했다. 놀이를 통해 카드를 내밀기도 하고,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놀이를 덧대기도 했다. 내년 가을학기에 입학하면 아직 1년이란 시간이 있지만. 엄마인 난 짧게 느껴졌다. 조급한 마음은 경주마가 ‘탕’ 소리와 함께 뛰쳐나가는 것 같았다. 앞서는 마음을 어금니 깨물고 부여잡았다. 느림보 거북이가 되어보자며 다짐을 반복했다.
고단했을 나를 위로하며 소파에 푹 몸을 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