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학교는 스쿨버스가 없다. 수영 수업으로 수영장 갈 때, 소풍 갈 때, 수학여행 갈 때 대여한 버스가 학교 앞으로 온다. 그 외에 등, 하교는 부모님이 차로 데려다준다. ‘다운천사’ 딸이 다니는 특수학교는 스쿨버스가 있다. 20대 되는 스쿨버스는 흩어져 사는 아이들을 태우고 8시 15분이면 학교 정문으로 모여든다. 부모의 자유의사에 따라 스쿨버스를 신청할 수 있기에 우린 스쿨버스를 신청하지 않았다. 데려다주고 데려오면서 유치원보다 조금 더 큰 사회에 나가는 딸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그 핑계로 학교 분위기도 보고 싶었다.
첫 등교 날 딸의 손을 잡고 정문에 들어서는 순간 난 삐걱거리는 로봇이 되었다. 아이들을 맞으러 나온 25명이 넘는 선생님이 줄 서 있었다. 한 반에 3명의 담임선생님과 5명의 도우미 선생님이 있다. 10개의 반이 넘으니 꽤나 많은 선생님이 매일 아침 서 있는 셈이다. 낯가림이 심한 난 눈이 마주치는 선생님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며 빠르게 지나갔다. 빨리 지나온 탓인지 손이 허전했다. 내 손에서 벗어난 딸은 인사하는 선생님들 사이로 사뿐사뿐 걸어오며 손을 흔들었다. 서로 멀리 있었지만 검은색 머리카락 덕분에 우리는 모녀지간임이 확실히 드러났다.
나에게 다가오는 딸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는 교실로 향했다. 교실 문 앞에는 담임선생님이 반겨주었다. 낯가림이라곤 쌀 한 톨만큼도 없는 딸은 입학식 이후 두 번째 만나는 선생님을 꼭 안았다. 선생님에게 딸을 부탁하고 경보하듯 숨을 헐떡이며 정문을 빠져나왔다. 차에 시동을 걸며 비로소 고른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은 딸보다 나에게 더 필요했다. 딸은 학교 가는 걸 즐거워했다. 주말이면 심심해서 비비 꼬다가도 월요일이면 노래 부르며 학교에 갔다.
학교 정문에 들어서면 서너 명의 선생님이 긴 벤치에 앉아 있다. 딸은 선생님 한 명 한 명 안아주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선생님으로 수두룩했다. 벤치를 지나면 삼삼오오 이야기하는 선생님들이 서 있다. 딸은 그 사이를 꼭 비집고 지나가며 짧은 팔을 높이 흔들었다. 교실로 지나가는 복도에서 마주치는 선생님조차 놓치지 않았다. 선생님의 손을 잡고 인사했다. 무뚝뚝하고 잘 웃지 않던 선생님도 딸이 인사하면 환하게 웃어주었다.
6개월이 지난 지금은 딸의 이름을 모르는 선생님이 없을 정도다. 딸이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하면 다음 날 안부를 묻는 선생님, 하굣길 함께 하는 선생님, 차에 타려다 딸을 발견하고는 되돌아오는 선생님도 있다. 오늘도 딸은 선생님들에게 사랑을 나눠준다. 딸의 뒷모습에는 하트가 퐁퐁 터진다. 마치 비눗방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