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대에서 공부를 마치고 삼 개월 만에 첫째가 생겼다. 사회생활 경험 없이 바로 전업 주부가 되었다. 엄마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 두 번째 출산으로는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집에서 아이들만 돌보며 지내다 보니 적극적인 삶보다는 수동적인 삶이 되었다. 남편에게 많이 의지했다. 아이들이 태어나 출생신고, 여권신청도 남편이 도맡아 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비자받는 일까지 남편의 몫이었다.
난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안주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심하고 낯가림이 심한 내 성격 탓도 있었다. 새로운 환경을 힘들어했다. 그런 나에게 '다운증후군'딸이 태어났다. '다운증후군' 딸을 잘 키우기 위해서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뀌어야 했다. 안주하고만 있다면 딸에게 꼭 해줘야 하는 걸 놓치게 될 것 같았다.
난 단순히 '다운증후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만 머릿속에 있었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몰랐다. 자료와 영상들을 찾아보며 엄지발가락과 두 번째 발가락 사이의 간격, 활처럼 휜 새끼손가락, 청력이 좋지 않은 경우도, 시력이 나쁠 경우도, 심지어는 귀지가 많다는 것조차도 자료와 영상을 통해 알았다.
'다운증후군' 딸은 두 아들과 달리 자주 아팠다. 건강하게 자라길 간절히 바랐다. 글리코 영양소를 먹이게 된 것도, 관련 강의를 찾아 들으며 공부를 시작한 것도 모두 딸을 위해서였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 궁금한 걸 검색해봤지만 이렇게 열심히 찾아보며 노력하지는 않았다. 딸은 특별했다. 애쓰지 않고는 제대로 키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딸을 위해 시작된 공부였지만 더 나아가 내 계발이 되었다. 집에서만 안주하던 난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욕구가 솟구쳤다. 딸로 인해 글쓰기도 시작했다. 글이라고는 학창 시절 일기, 아이들 낳고 육아일기를 쓴 게 다였다. 글쓰기를 시작하며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상을 기록해 나갈 수 있게 됐다. 아이들을 키운다는 이유로 책을 멀리 했었다. 어느새 인가 책을 읽어야겠다는 다짐도 섰다.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분위기가 되었다. 새로운 도전 앞에 두려움은 점차 살아졌다. '다운증후군'딸의 엄마가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성취감이다. 두 아들과 딸로 인한 내 삶의 중심은 언제나 아이들이었다. ‘나’라는 존재는 공존하지 않았다. 지금도 아이들 육아로 바쁜 일상을 살아내지만 그 안에 ‘나’가 함께 존재한다. 특별한 딸은 배움의 길로 나를 안내했다. 그로 인해 적극적이고 대범한 엄마로 바꿔놓았다. 딸이 자라듯 나도 함께 자란다.